코펜하겐(덴마크) — 2026년 상반기 소매업계가 전개되는 가운데 글로벌 패션 산업에서는 묘한 역설이 자리 잡고 있다.
2026년 5월 20일 CNBC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파리의 런웨이와 주요 패션 대기업의 디지털 매장은 이른바 ‘친환경’ 메시지로 가득하다. 덴마크 주얼리 업체 Pandora(파노라)는 랩그로운 다이아몬드(lab-grown diamonds, 연구실에서 배양한 인공 다이아몬드)에 집중하고 있고, Kering(케어링)의 구찌는 ‘순환형’ 폴리에스터를 내세우고 있으며, 주요 리테일 앱들은 중고 거래 플랫폼을 속속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적극적인 마케팅에도 불구하고 패션업계 경영진은 대다수 소비자가 지속되는 생활비 위기 속에서 윤리적으로 생산된 제품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할 의사가 없다고 인정한다. 이른바 지속가능성 프리미엄을 감당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소비자들은 점점 더 선택적으로 움직이며, 무엇보다 가격과 가치를 우선시하고 있다.
패션 산업은 여전히 기후변화에 크게 기여하는 분야다. 전 세계 탄소배출의 약 10%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비자가 이런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는데도 왜 업계는 판매로 이어지지 않는 메시지에 다시 힘을 싣는 것일까. 답은 냉정한 위험관리에 있다.
기존 성장 공식에서 벗어나는 패션업계
지난 10여 년 동안 소매업의 재무 전략은 비교적 단순했다. 규모를 키우고, 조달 비용을 낮추며, 재고를 털기 위해 전술적 할인 행사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맥킨지와 The Business of Fashion이 최근 발표한 State of Fashion 보고서에 따르면 2026년에는 브랜드들이 더 이상 이런 레버리지에만 기대어 수익을 키우기 어렵다.
오히려 브랜드 힘과 유연한 조달이 마진 방어의 핵심 수단으로 부상하고 있다. 보고서는 경영진들이 마진과 비용 전략의 변화를 2026년 업계를 형성하는 두 번째로 중요한 흐름으로 꼽았으며, 이는 관세 같은 무역 차질에 이어 두 번째라고 전했다.
소비자 수요가 흔들리고 신규 전자상거래 경쟁이 거세진 가운데, 생산 라인을 직접 흔드는 거시경제 충격도 업계의 부담을 키우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는 에너지 가격을 끌어올렸고, 그 결과 폴리에스터 같은 석유 기반 합성섬유의 원가도 상승하고 있다. 폴리에스터는 석유에서 나오는 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대표적인 합성섬유로, 의류업체의 원가 구조와 직결된다.
마진이 얇은 할인 유통업체 입장에서는 원가 상승이 지속가능성 노력을 더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일부는 이런 문제를 외면할 경우 오히려 더 큰 취약성이 생긴다고 지적한다.
“[지속가능성]은 위험을 완화하는 문제다. … 그것은 경쟁 우위이기도 하다.”
— 헬레나 헬메르손, 전 H&M 최고경영자
헬메르손 전 H&M 최고경영자는 중동 분쟁과 그에 따른 에너지 충격이 일부 기업들로 하여금 운송, 공급망, 원자재 가격에 대한 우려를 키우게 만들면서 환경·사회 이슈를 후순위로 밀어냈다고 CNBC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는 “그럴 때 지속가능성이 곧 비즈니스라는 점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라며 “장기적 관점을 가진 기업들은 지금 추가적인 추진력을 얻고 있다. 유가가 오르면 폴리에스터 가격도 오른다. 운송비도 오르내리지만 변동성이 너무 커서 지속가능한 사업을 만들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현재 여러 소매업 이사회에 참여하고 있는 헬메르손은 자원 관리부터 지속적인 수익성 확보까지 아우르는 지속가능성이 이제 CFO최고재무책임자들의 최우선 과제가 됐다고 강조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다른 기업들보다 원자재 의존도를 낮추고, 가격을 더 잘 파악하며, 견고한 사업을 구축할 수 있느냐는 문제”라며 “이것은 위험 완화의 문제이자 경쟁 우위”라고 말했다.
“자선이 아니라 사업이다”
환경 변동성의 압박은 시장 상단, 즉 명품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하고 있다. 케어링의 지속가능성 및 대외협력 총괄 마리클레르 다부는 캐시미어와 고급 가죽처럼 명품을 정의하는 소재 자체가 기후 변화의 영향을 받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동아시아의 극심한 기상 패턴이 캐시미어 생산을 위협하고, 산불은 실제 부티크의 재고를 태워버릴 수 있으며, 물 부족은 태너리가죽 가공 공장의 운영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CNBC에 말했다.
“자선이 아니라 정말 사업이다.”
다부는 기후 대응이 기업의 손익계산서에 직접 반영될 수 있다고 강조하며 “매우 빠르게 P&L손익계산서에서 이것이 얼마나 흥미로운지 입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명품 시장에서는 지속가능성이 단지 비용이 아니라 창의성을 자극하는 수단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기관투자가들은 재무 설명회와 로드쇼에서 전통적인 실적 지표와 마찬가지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지표를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고 다부는 말했다. 소셜미디어 시대에는 공급망의 열악한 노동 조건이나 동물복지 논란이 한순간에 수십억 달러의 브랜드 가치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문제가 생기면 브랜드 가치가 매우 빠르게 훼손될 수 있다”고 말했다.
K자형 소비 현실과 양극화
많은 브랜드가 ‘업그레이드’와 ‘프리미엄화’를 이야기하지만, 소비 현실은 훨씬 더 뚜렷하게 갈라지고 있다.
이른바 K자형 경제에서는 부유층이 여전히 고급 상품에 소비를 이어가며, 이들에게 지속가능성은 가격표에 이미 포함된 전제 조건처럼 받아들여진다. 다만 맥킨지의 선임 파트너 젬마 다우리아는 이들조차 럭셔리 피로감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지출이 가치 중심 품목과 헬스·웰니스 같은 새로운 럭셔리 카테고리로 이동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고 CNBC에 말했다.
반면 저소득층 소비자는 환경 발자국과 무관하게 가장 낮은 가격을 제시하는 초저가 패스트패션 대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
글로벌 패션 어젠다 CEO 페데리카 마르키온니는 “소비자들이 스스로 선택에 돈을 쓰며 이끌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지만, 현재로서는 더 비싼 지속가능 제품에 프리미엄을 지불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Pandora는 이미 랩그로운 다이아몬드 전략에 무게를 두고 있으며, 최근에는 고객이 다이아몬드의 기후 영향을 비교할 수 있도록 탄소발자국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9월 6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Pandora의 행사에서 배우 파멜라 앤더슨이 랩그로운 다이아몬드를 기념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Pandora의 최고마케팅책임자 제니 파머는 탄소발자국 공개가 판매를 직접 끌어올리기 위한 조치는 아니라고 CNBC에 말했다.
랩그로운 다이아몬드는 천연 다이아몬드보다 상당히 저렴하기 때문에 Pandora는 “매우 분명하게 접근 가능한 주얼리, 즉 진입 가격대가 있는 제품을 제공하고 있다”고 파머는 설명했다.
그는 “경기가 조금 압박을 받을 때도 사람들이 정말 특별한 것을 살 수 있게 해준다”며 “하지만 우리는 또한 소비자들이 결국 그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렇게 되면 우리 사업도 더 탄력적으로 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소재로 전환하고 공급망을 탈탄소화하려면 초기 자본 지출이 필요하며, 재무적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장기적 관점이 필수적이다.
코펜하겐에서 열린 Global Fashion Summit에서 여러 경영진은 재활용 소재로 전환하도록 유도하는 금융 인센티브가 여전히 부족하다고 CNBC에 말했다.
헬메르손은 “순환형 소재를 쓰기 위한 단기 인센티브는 없고, 오히려 더 많은 비용을 내야 한다”며 “우리는 자연에 가격이 매겨지지 않은 시장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제품과 서비스의 자원 발자국에 과세하는 방식처럼 자연에 대한 과세를 늘리고, 노동에 대한 과세는 줄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순환경제로의 전환 압박
순환형 모델의 목표는 선형적인 ‘생산-소비-폐기’ 구조에서 벗어나, 제품이 재판매·수선·재활용되어 다시 새 원단으로 돌아가는 체계를 만드는 데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인프라는 상당하며, 텍스타일-투-텍스타일 재활용 기술은 이제 막 대규모 확장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이는 기존 섬유를 원료로 다시 섬유를 만드는 방식으로, 의류 폐기물 감축의 핵심 기술로 꼽힌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따르면 2024년 전 세계 섬유 폐기물은 1억2천만 미터톤에 달했다. 폐기된 의류 가운데 약 80%는 매립지나 소각로로 향했고, 12%만 재사용됐으며, 1%도 되지 않는 비율만이 새로운 섬유로 재활용됐다.
소비자 수요가 과잉생산이라는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충분한 압력을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가오는 규제가 기업 행동을 바꿀 수도 있다. 유럽연합은 지속가능한 제품을 위한 에코디자인 규정(ESPR) 아래 기업의 그린워싱과 재고 낭비를 끝내기 위한 다양한 준수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규정을 지키지 못한 브랜드는 평판 훼손뿐 아니라 재무적 제재까지 마주할 수 있다.
지속가능성은 ‘선택’이 아니라 장기 생존 전략
지속가능한 선택은 이제 소비자에게만 호소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주주를 직접 겨냥한 전략으로 바뀌고 있다. 결국 친환경을 외면하는 브랜드는 환경적으로 뒤처질 뿐 아니라 장기 투자처로서도 불안정하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헬메르손은 지속가능성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 기업은 장기적으로 수익성을 유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문제들을 이사회에서 다루지 않는다면, 내 세계에서는 주주를 위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Pandora와 고급 캐시미어 브랜드로 불리는 브루넬로 쿠치넬리 같은 일부 기업은 결국 젊은 세대가 지갑을 통해 변화를 이끌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이들은 Z세대가 환경 윤리에 점점 더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보지만, 현재의 구매력은 이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지금 업계는 마라톤을 뛰는 단계에 있다고 마르키온니는 말했다.
“우리는 항상 결승선을 보지는 못한다. 그리고 오늘 벌어지는 모든 혼란 때문에 그 결승선은 더 멀어지고 있다.”
글로벌 패션 산업이 직면한 지속가능성의 문제는 더 이상 윤리적 선택의 차원이 아니라, 원가·공급망·브랜드 가치·투자 안정성을 동시에 좌우하는 핵심 경영 이슈로 자리 잡고 있다. 가격 민감도가 높아진 소비 시장에서는 친환경 전략이 즉각적인 매출로 연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만, 에너지 가격 급등과 원자재 변동성, 규제 강화가 겹치는 환경에서는 지속가능성 투자가 오히려 리스크를 줄이는 방어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업계가 단기 판매보다 장기 생존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이동할 경우, 향후 패션 제품의 가격 구조와 공급망 재편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