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러시아 중앙은행의 해외 동결 자산을 활용해 우크라이나의 방위 및 재건을 지원할 ‘전쟁배상(Reparations) 대출’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다.
2025년 9월 30일, 로이터 통신 브뤼셀 발 보도에 따르면,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는 러시아가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서방 금융시장에서 동결된 약 3,000억 달러 규모의 자산 가운데 현금화된 부분을 우크라이나가 즉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설계 중이다.
계획의 핵심은 동결 자산을 몰수하지 않고도 그 수익을 우크라이나가 선제적으로 활용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집행위는 이를 위해 ‘전쟁배상 대출(Reparations Loan)’이라는 특수 채권을 발행하고, 만기가 도래해 현금화된 러시아 국채·기관채 보유액을 담보로 삼는 구상을 내놨다. 해당 대출은 훗날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공식적인 전쟁배상을 받게 되는 시점까지 원리금 상환을 유예받게 되며, 사실상 ‘앞당겨 쓰는 배상금’의 성격을 띤다.
어떻게 작동하나
집행위 설명에 따르면, 동결 자산을 보관·결제 처리하는 브뤼셀 소재 중앙예탁기관 유로클리어(Euroclear) 계좌에 쌓인 현금 잔액을 특수목적기구(SPV)로 이전한 뒤, SPV 지분을 EU 회원국(또는 캐나다·일본·미국 등 비(非)유럽 G7 국가 포함)이 보유한다. 유로클리어는 현금을 넘겨주는 대가로, 집행위가 발행하는 만기·이자 0% ‘제로 쿠폰’ 채권을 받아 소송 위험을 헤지한다.
“EU 27개 회원국이 모두 SPV에 참여하되, 헝가리·슬로바키아 등 친(親)모스크바 성향 국가가 빠질 경우 나머지 회원국과 비유럽 G7이 별도 구조를 짜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라고 EU 고위 관계자는 전했다.
동결 자산 규모 및 사용처
집행위 자료에 따르면 서방이 묶어둔 러시아 중앙은행 자산 총액은 3,000억 달러에 달하며, 이 가운데 2,100억 유로(2,290억 달러)가 유럽 내에, 그중 1,850억 유로가 유로클리어에 보관돼 있다. 2022년 이후 만기가 돌아온 채권이 현금으로 전환되면서 1,760억 유로가 이미 현금화됐고, 2026년까지 추가로 90억 유로가 만기 도래 예정이다.
다만 EU는 지난해 합의한 G7 450억 유로(500억 달러) 우크라이나 긴급 대출을 동결 자산 수익으로 상환하기로 했던 기존 약속을 존중하기 위해, 먼저 해당 금액을 상환한다. 이후 남는 약 1,400억 유로가 이번 ‘전쟁배상 대출’의 재원으로 활용될 전망이다.
분할 집행·국방 협력 연계
대출은 분할(tranche) 방식으로 집행돼, 필요 시기에 맞춰 유로클리어 현금 잔액이 단계적으로 SPV로 이전된다. 각 트랜치는 사전에 합의된 재정·거버넌스 조건을 충족해야 하며, 일부 자금은 EU 공동 방산 프로젝트를 위한 ‘SAFE(Strategic Technologies for Europe Platform)’ 이니셔티브와 연계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일반 예산 지출 역시 지원 대상에 포함된다.
용어 설명
SPV(특수목적기구)란 특정 자산·부채를 떼어내기 위해 설립하는 별도 법인을 가리킨다. 본 계획에서 SPV는 동결 자산을 보유·운용하며, 가입국이 지급보증을 제공한다.
제로 쿠폰 채권은 이자(쿠폰)를 지급하지 않는 대신 할인 발행돼 만기 시 액면가를 수취하는 채권이다. 본 건에서는 유로클리어가 현금을 넘기는 대가로 받아 소송 위험을 헤지하는 안전장치 역할을 한다.
향후 과제
집행위는 국제통화기금(IMF)이 2026~2027년 우크라이나의 재정 공백을 1,300억 유로로 추산할 것이라는 핀란드·스웨덴 정부의 예비 분석을 토대로, 대출 규모·상환 일정·투자 운용 전략을 최종 확정할 예정이다. 관건은 동결 자산을 ‘몰수’하지 않은 채 법적 정합성을 유지하면서도, 우크라이나가 필요한 시점에 즉각적으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유럽중앙은행(ECB)과 일부 회원국은 자산 몰수가 국제법 및 통화정책 안정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집행위는 ‘몰수’가 아닌 ‘현금화·투자’라는 구조를 통해 법적 위험을 최소화하고, SPV 채권 보증으로 금융시장 충격을 억제한다는 입장이다.
이번 제안은 2024년부터 이어진 서방의 러시아 제재를 한 단계 진화시키는 조치로 평가된다. 시의적절한 재정 지원이 이뤄질 경우, 우크라이나는 장기 재건 계획에 착수함과 동시에 전선 방어력도 강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