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베를린발 = 로이터 통신 공동취재
프랑스 배우 보리스 레흘랭제는 거리에서 알아보는 이가 많지 않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여는 순간, 수백만 명의 프랑스 관객은 벤 애플렉·호아킨 피닉스·’장화 신은 고양이’의 목소리로 단숨에 그를 알아챈다. 프랑스어 더빙계의 스타인 그는 이제 인공지능(AI) 시대에 자신의 직업이 사라질 위기에 맞서 싸우고 있다.
2025년 7월 30일, 인베스팅닷컴의 보도에 따르면 레흘랭제는 “아직 내 목소리가 AI로 대체되지는 않았지만, 큰 위협을 느낀다”고 로이터통신에 말했다. 그는 배우·번역가·프로덕션 디렉터·대사 각색가·음향 엔지니어 등으로 구성된 팀이 관객에게 ‘입 모양과 음성의 괴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섬세하게 작업해 왔다며, 이러한 인간의 공력(工力)이 하루아침에 빼앗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글로벌 스트리밍 붐이 수요를 키우다
넷플릭스(NASDAQ: NFLX)와 같은 플랫폼은 ‘오징어 게임’·’뤼팽’ 등 글로벌 흥행작마다 현지 더빙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 왔다. 시장조사업체 GWI에 따르면 독일·프랑스·이탈리아·영국 시청자의 43%가 자막보다 더빙을 선호한다. 이로 인해 더빙 시장 규모는 2025년 43억 달러, 2033년 76억 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비즈니스 리서치 인사이트는 전망했다.
그러나 성장하는 파이를 노린 ‘기술 기반 자동 더빙’도 함께 커지고 있다. 플랫폼들은 가입자 확보와 광고주 유치를 위해 비용 절감 솔루션을 찾고 있으며, AI 음성 합성 기술이 빠르게 고도화되고 있다.
“우리에겐 고속도로 교통법규 같은 규제가 필요하다”
“자동차가 마차를 대신하자 도로교통법규가 필요했듯, 이제 AI 시대의 목소리에도 규제가 필요하다.” — 보리스 레흘랭제
유럽 성우협회들은 EU에 저작권 보호·일자리 보전·품질 유지를 위한 강력한 입법을 촉구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12명의 유명 성우가 3월 틱톡에 올린 캠페인 영상 “Künstliche Intelligenz statt Künstler? Nein danke!“(인공지 아닌 예술가를 보호하라)가 870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독일 성우협회(VDS)가 시작한 청원에는 7만 5,500명 이상이 서명하며, ①AI 학습용 음성 사용 시 명시적 동의, ②공정한 보상, ③AI 생성 콘텐츠의 투명한 표시를 요구했다.
VDS 소속 성우 세드리크 카바토르는 “지적재산권이 보호되지 않으면, 내일이면 도둑맞을 것이라 생각해 아무도 콘텐츠를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VDS는 20,000여 명이 가입한 글로벌 네트워크 유나이티드 보이스 아티스트와도 손잡고 윤리적 AI 활용·공정 계약을 촉구 중이다.
할리우드도 AI와 힘겨루기
2023년 파업 사태 이후, 미국 영화산업은 AI를 둘러싼 뜨거운 노사 갈등을 경험했다. 넷플릭스 공동 CEO 테드 서랜도스는 최근 오리지널 시리즈 ‘엘 에테르나우타(El Eternauta)’에서 시각효과(VFX) 일부를 생성형 AI로 제작했다고 밝혔다. 또 AI를 활용해 배우 입 모양을 현지 더빙 대사와 동기화(lip-sync)하는 실험도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러한 실험은 현지 성우가 실제로 더빙 대사를 녹음한 뒤, AI로 입 모양을 맞추는 방식이다. 미국 배우조합 SAG-AFTRA가 최근 체결한 새 계약은 *외국어→영어 더빙 작업에 AI 활용을 허용(단, 성우에게 반드시 개런티 지급)한다. 넷플릭스는 로이터의 더빙 AI 활용 관련 질의에 답변을 거절했다.
*SAG-AFTRA: 미국 영화·TV·라디오·게임 배우 및 성우 16만여 명이 소속된 최대 노조
이미 실험대 오른 AI 더빙…품질 논란
독일 뮌헨의 노이에 톤필름 뮌헨 스튜디오 대표 에버하르트 베커를레는 “AI와 인간 더빙이 공존하길 바란다”면서도 “가장 싸구려 방식으로 제작하고 ‘품질 저하’를 소비자가 감수하게 된다면 최악”이라고 우려했다. 실제로 올해 초 스트리밍 서비스 비아플레이가 폴란드 범죄 시리즈 ‘Murderesses’에 도입한 독일어 ‘하이브리드 더빙’(인간+AI)은 “단조로운 목소리”라는 혹평 끝에 영어권 서비스에서 전면 철수됐다.
해당 작업을 맡았던 이스라엘 스타트업 딥더브(DeepDub)는 로이터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비아플레이 그룹 부사장 반다 랩티는 “앞으로 자막 서비스를 유지하고, 더빙은 선택적 콘텐츠에 한정하겠다”고 밝혔다.
GWI 조사에 따르면 시청자의 절반 가까이는 콘텐츠가 AI로 제작됐다는 사실이 시청 경험에 큰 변화를 주지 않는다고 답했다. 25%는 “조금 덜 좋아질 것”이라고 했고, 3%만이 “훨씬 더 좋아질 것”이라고 답해 AI 더빙 수용성이 지역·세대별로 엇갈림을 시사했다.
스타트업 “AI는 은탄환”…그러나 인간 감정은 여전히 필요
독일 오디오 이노베이션 랩의 CEO 슈테판 스포른은 AI로 칸 영화제 출품작 ‘블랙 도그’를 중국어에서 독일어로 더빙했고, “AI가 성우를 대체하진 않지만 역할을 재편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솔루션은 원배우 음성을 변환·이식해 현지어를 구현, 진정성·효율성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설명이다. “제작사·스튜디오·광고주 모두가 관심이 폭발적”이라는 그는 음성 감정·대본 번역·문화적 뉘앙스는 결국 인간이 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국 스타트업 플로리스 AI(Flawless AI)도 “우리는 지역 성우와 협업해 윤리적 AI를 지향한다”며, 입 모양 동기화 기술을 통해 “영화 제작 방식의 지각변동을 가져올 은탄환”이라고 자평했다.
전문가 시각: 한국 시장에 주는 함의
국내에서도 OTT 경쟁이 심화하며 콘텐츠 지역화 비용 절감이 화두다. 한국은 자막 소비 비중이 높지만, K-콘텐츠 수출 확대를 위해 현지 맞춤형 더빙 수요가 급팽창하고 있다. AI 더빙 기술은 비용·속도·언어 장벽 해결책이 될 수 있으나, 성우 생태계·저작권 침해·품질 저하 등 부작용도 함께 따라온다. 이는 성우노조, 제작사, 플랫폼, 규제기관 간 다자(多者) 협력 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는 점을 방증한다.
특히, 한국은 방송통신위원회·문화체육관광부가 콘텐츠 산업 진흥과 공정 생태계를 동시에 지향하고 있어, 유럽·미국 사례는 규제 설계의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AI 더빙이 단순 비용 절감 수단을 넘어, 언어·문화 다양성 확장이라는 긍정적 효과를 끌어내야 한다”고 지적한다.
결국, 인간의 창의성과 기술 혁신의 균형을 찾는 것이 미래 더빙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