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의회가 이미 승인한 49억 달러(약 50억 달러) 규모의 해외원조 예산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겠다고 나서면서, 미 연방정부 지출권을 둘러싼 행정부 대 의회 갈등이 다시 한 번 격화되고 있다.
2025년 8월 29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늦은 밤 온라인에 공개한 서한을 통해, 하원 의장 마이크 존슨에게 “국제 프로그램 15건에 대한 자금 집행을 보류하겠다”고 통보했다.
미국 헌법은 지출 승인의 권한을 의회에 부여하고 있으며, 의회는 매 회계연도마다 정부 운영비를 법률 형태로 확정한다. 따라서 행정부가 예산을 쓰지 않으려면 다시 의회의 재승인을 받아야 한다. 실제로 의회는 지난 7월 해외원조·공영미디어 예산 90억 달러를 삭감하는 데 동의한 바 있다.
포켓 리세션(pocket rescission) ※이란?
이번 조치는 “포켓 리세션(pocket rescission)”으로 불린다. 이는 행정부가 의회의 동의 없이 예산을 일정 기간 ‘주머니에 넣어’ 집행을 지연한 뒤, 회계연도 말까지 시간을 끌어 사실상 예산을 소멸시키는 방식이다. 트럼프 행정부 예산국장 러셀 보이트는 “대통령은 최대 45일간 자금 집행을 유보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9월 30일 회계연도 종료 시점을 노골적으로 거론했다. 백악관은 “해당 전술이 마지막으로 쓰인 것은 1977년”이라고 밝혔다.
금요일 법원에 제출된 문서에 따르면, 보류 대상 예산은 주로 해외원조·유엔 평화유지 활동·민주주의 증진 사업에 배정돼 있었다. 대부분은 USAID가 관리해 왔으나, 트럼프 행정부는 해당 기구를 대폭 축소해 왔다.
“이번 조치로 우리의 예산·유동성 상황은 훨씬 더 어려워질 것이지만, 세부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미 당국과 추가 협의에 나설 것이다.”
— 스테판 뒤자리크 유엔 대변인, 8월 29일
민주당은 “행정부가 총 4,250억 달러 이상을 동결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반면 공화당 의원 다수는 “지출 삭감이라면 어떤 형태라도 지지한다”며 의회 권한 약화를 감수하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상원 세출위원장인 메인주 출신 공화당 중진 수전 콜린스 의원은 “이번 조치는 불법”이라고 못 박았다. 그녀는 성명에서 “법을 훼손하려는 시도 대신, 초당적 연례 예산 절차를 통해 과도한 지출을 줄이는 것이 올바른 접근”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은 의회가 제정한 모든 지출법을 무시하면서 9월 말 정부 셧다운을 유도하려는 의도다.”
— 척 슈머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
슈머 원내대표는 이어 “공화당이 이 ‘참사’에 도장만 찍는 거수기가 될 필요는 없다”고 경고했다.
전문가 해설
포켓 리세션은 외형상 ‘합법적 절차’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의회의 예산 편성·집행 통제권을 잠식한다는 점에서 논란이 크다. 1974년 제정된 예산통제·임파운드먼트 법(BICA)은 행정부가 예산 집행을 거부(impoundment)할 때 반드시 의회의 동의를 얻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BICA에는 ‘회계연도 종료 시점까지 의회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예산이 자동 소멸된다’는 허점을 안고 있어, 이를 이용한 것이 바로 포켓 리세션이다.
이번 사안은 단순히 50억 달러 규모의 해외원조 문제를 넘어, 행정·입법 권한 분립이라는 헌법적 원칙과 직결된다. 행정부는 ‘세수 부족 및 국가부채 관리’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의회는 ‘재정 전권’을 핵심 헌법 권한으로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향후 의회-행정부-사법부 간 삼권분립 질서 재조정 논의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국제기구 및 수원국들은 예산 공백으로 예정 사업이 차질을 빚을 수 있어, 미 국익·외교력에도 부정적 파급효과가 예상된다. 실제로 유엔 평화유지 기금과 민주주의 지원 프로그램은 개발도상국 안보·정치 안정에 직결돼 있어, 미국의 책임론이 거세질 전망이다.
앞으로 9월 30일까지 남은 기간 동안 의회는 ‘예산 집행 강제’ 또는 ‘긴급 패키지 법안’ 카드로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셧다운 및 행정부 기능 마비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