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정치권이 또다시 사법기관의 결정으로 급변했다. 헌법재판소(Constitutional Court)는 30일, 패통탄 친나왓(Paetongtarn Shinawatra) 총리를 직무정지 2개월 끝에 최종 해임했다. 이번 결정으로 내각 전원은 즉시 직을 상실하지만, 새 내각 출범 전까지 ‘관리(Caretaker) 정부’ 형태로 한시적 업무만 수행하게 된다.
2025년 8월 29일, 인베스팅닷컴의 보도에 따르면 헌법재판소는 태국 헌법 160조 5항(Section 160(5))을 근거로 ‘중대한 윤리 위반(Serious Ethical Breach)’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공개 선고문에서 “총리가 공직윤리를 훼손해 국가와 정부의 신뢰를 실질적으로 손상시켰다”고 명시했다.
160조 5항이란?
태국 헌법은 2017년 개정 이후, 고위 공직자가 부정부패·충돌 이해·권력 남용 등 윤리 규범을 위반할 경우 헌재가 선출직을 포함한 모든 직무를 박탈하도록 규정한다. 한국의 ‘공직자윤리법상 직무정지’와 유사하지만, 태국은 헌법 조항으로 직접 명문화해 사법적용 범위가 더 넓다.
헌재 결정 직후, 정부 대변인은 “각료 26명 전원이 즉시 사임 처리됐으나 새 총리가 국왕 승인을 받을 때까지 행정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긴급·회계·외교적 필수 업무만 수행한다”고 밝혔다. 태국은 헌법상 ‘관리 내각’이 법률·예산 처리 권한을 갖지 못하므로, 현재 추진 중인 2026 회계연도 예산안과 주요 인프라 투자 계획은 모두 전면 보류 상태에 들어갔다.
“이번 해임은 최근 20년간 태국 정치에서 반복되어 온 사법 개입 패턴의 연장선이다.” – 방콕 출라롱콘대 정치외교학과 아피찻 교수
실제로 2006년 탁신 친나왓, 2014년 잉락 친나왓, 2022년 쁘라윳 짠오차에 이어 패통탄 친나왓까지 총 네 명의 총리가 헌법재판소 혹은 군부·사법기관 결정으로 중도 퇴진했다. 정권교체가 선거가 아닌 법정과 쿠데타를 통해 빈번히 일어나는 태국 특유의 ‘사법·군사 정치’ 현상이 재확인됐다는 평가다.
시장·경제 파급
이번 결정이 발표된 직후 방콕 증권거래소(SET)는 장중 한때 1.8% 급락했다가 일부 낙폭을 회복했지만, 외국인 순매도 규모는 5,200억 바트(약 14억 달러)로 집계됐다.*SET 데이터 기준, 14:30(현지시각) 환율도 달러·바트가 0.7% 상승하며 변동성이 확대됐다. 채권시장에서는 10년물 국채금리가 12bp 올라 ‘위험 프리미엄’을 반영했다.
분석·전망
① 정치 불확실성 장기화: 새 총리 선출은 의회 하원(500석)과 군부·왕실이 지명한 상원(250석)의 동시 투표로 결정된다. 야권은 과반을 넘지 못해, 총리 후보자 합의까지 수개월 걸릴 가능성이 크다.
② 재정 지출 지연: 관리 내각 제한으로 사회복지 확대안, 농민 보조금, 공항·항만 현대화 사업 등이 모두 멈춰 설 경우, 2025년 GDP 성장률(공식 전망치 3.8%)이 0.4~0.6%p 하향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③ 투자 심리 위축: MSCI 신흥국지수 편입 비중이 2.3%에 불과한 태국은 지정학적 프리미엄이 낮다. 이번 사태로 글로벌 기관투자가의 자금 유입이 인도네시아·베트남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문가 시각
경제 컨설팅사 ‘Siam Insight’의 스리라폰 수파완 CEO는 “정치 리스크가 태국 투자 매력도를 꾸준히 제한해 왔다”며 “기관투자가 관점에서 태국은 분명 저평가(zone of value) 상태지만, 정치적 ‘할인(discount)’이 구조적으로 내재돼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총리 해임이 단기간 금융시장 충격으로 끝날지, 2024년 이후 대규모 자본이탈로 번질지는 “새 정부 구성 속도와 헌재 판결에 대한 대중 수용도가 변수”라고 말했다.
반면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Fitch Ratings)는 “태국의 거시경제 펀더멘털이 탄탄해 국가신용등급(A-)을 즉각 조정할 요인은 없다”면서도 “정치적 교착 상태가 장기화하면 차후 신용전망(neutral to negative) 조정 가능성”을 열어뒀다.
낯선 용어 풀이
• Caretaker 정부: 새 정부가 구성될 때까지 기존 내각이 제한적·관리적 권한만 행사하는 과도 체제를 가리킨다.
• 윤리적 중대한 위반: 태국 헌법이 규정한 정치·행정 윤리 위반 중 가장 높은 정도로, 국익·공직 신뢰 손상이 명백한 경우에 해당한다.
• bp(Basis Point): 금리 변동 단위를 의미하며, 1bp는 0.01%p에 해당한다.
태국은 결국 또 한 번 사법적 판결로 정권이 교체되는 ‘정치적 데자뷔’를 겪고 있다. 관건은 의회가 얼마나 빠르게 국왕의 재가를 받을 새 내각을 출범시킬 수 있느냐다. 정치·사법 리스크가 계속될 경우, 투자자에게 태국은 매력적인 소비·관광 시장임에도 불구하고 ‘할인 요인’이 더 커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