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밀라노발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중국 전기차(EV) 기술이 글로벌 완성차 업계의 설계·개발 방식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다.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 아우디가 2021년 중국 지커(Zeekr)의 ‘001’ 모델을 처음 목격한 순간이 이를 상징한다. 당시 600km 이상 주행이 가능한 롱레인지 전기차에 유럽풍 디자인을 결합한 해당 모델은 아우디 경영진에게 강렬한 경각심을 안겼다.
2025년 9월 11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지커 001은 사실상 모든 이를 충격에 빠뜨렸다. 우리는 즉각 대응해야 했다”라고 SAIC-아우디 세일즈·마케팅 사장 슈테판 펌첼(Stefan Poetzl)은 회고했다. 결국 아우디는 중국 합작사인 상하이자동차(SAIC)의 배터리, 전동 파워트레인, 인포테인먼트 소프트웨어, 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ADAS)을 통째로 들여와 ‘AUDI E5 Sportback’을 단 18개월 만에 완성했다.
아우디는 약 3만3,000달러 수준의 가격 경쟁력을 확보한 해당 모델을 이달 중 중국 시장에 선보일 계획이다. 글로벌 경쟁사들도 ‘중국산 지식재산권(IP)’을 적극 도입해 개발 기간을 단축하려는 움직임을 가속화하고 있다. 토요타는 광저우자동차(GAC)와, 폭스바겐은 샤오펑(小鵬)과 각각 중국 전용 모델 공동 개발에 착수했고, 르노와 포드는 글로벌 전략차까지 중국 플랫폼에 올리겠다는 구상을 내비쳤다.
‘China Inside’ 전략은 무엇인가
업계는 이를 1990년대 인텔(Intel)의 ‘인텔 인사이드’ 캠페인에 빗대 ‘차이나 인사이드(China Inside)’라 명명했다. 당시 인텔은 자사의 첨단 반도체를 채택한 PC를 ‘프리미엄 제품’으로 격상시켰는데, 오늘날 중국 완성차 기업들은 배터리·섀시·소프트웨어를 ‘완제품 키트’ 형태로 제공해 소규모 제조사나 틈새 시장 진입을 돕고 있다.
지커 외에도 리프모터(Leapmotor)가 스텔란티스(Stellantis)와 손잡고 해외 판매를 추진 중이며, 추가 브랜드와 기술 라이선스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고 최고경영자(CEO) 주장밍이 밝혔다. 전문가들은 중국산 EV 플랫폼을 활용하면 수년의 개발 기간과 수십억 달러의 연구·개발(R&D)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르노는 2021년부터 동풍자동차 플랫폼을 채용한 다치아 스프링(Dacia Spring)으로 유럽 저가 EV 시장을 공략했고, 현재는 상하이 연구센터에서 차세대 전동화 ‘트윙고(Twingo)’를 개발 중이다.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중국 EV 공학 전문기업 런치디자인(Launch Design)이 플랫폼 기술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전략·컨설팅 firm 오토데이터스(Autodatas)의 윌 왕은 “현재 중국 내 EV 가격 전쟁과 대외 무역 갈등으로 수익성이 압박받는 상황에서, 로열티 비즈니스는 중국 업체에 새로운 탈출구가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글로벌 전통 완성차의 ‘시간 단축’ 전략
폭스바겐은 샤오펑과 공동 개발한 전용 플랫폼으로 중국 내 내연기관·하이브리드·순수전기 모델을 동시에 확대할 계획이다. 상하이 컨설팅사 오토포사이트(AutoForesight)의 장야얼 대표는 “폭스바겐이 샤오펑 기술로 자사 E/E(전기·전자) 아키텍처를 대체하거나 보완할 수 있을지 검증하고 있다”면서, “중국에서 성공 모델이 입증되면 글로벌에도 적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포드 역시 플랫폼 파트너를 물색 중이다. 짐 팔리(Jim Farley) CEO는 중국 EV를 직접 시승하며 샤오미의 ‘SU7’에 대해 ‘인상적’이라는 평가를 남겼다. CATL과의 배터리 기술 라이선스 계약처럼, 섀시·소프트웨어까지 외부 조달 범위를 넓히려는 그림이다.
모듈러 플랫폼이란 차량의 ‘뼈대’를 규격화해 여러 차종을 빠르게 파생할 수 있게 하는 구조를 뜻한다. 테슬라가 먼저 시도한 이 방식은 부품 공용화로 가격을 낮추고, 무선(OTA) 업데이트로 기능을 지속 진화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새로운 수익원 vs. 브랜드 정체성 약화
컨설팅사 올리버 와이먼의 마르코 산티노 애널리스트는 “중국의 치열한 경쟁이 만들어낸 ‘화력’을 빌려오면, 전통 업체도 짧은 시간 내 더 완성도 높은 제품을 출시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동시에 “남의 기술에 과도하게 의존하면 브랜드 차별화가 한계에 봉착한다”고 경고했다.
영국 애스턴마틴 전 CEO 앤디 팔머도 “R&D 비용을 줄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단순 리테일러에 머물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업계는 고유 소프트웨어·디자인·주행 감성 등 자체 역량을 일정 부분 탑재해 ‘중국 기술+자사 개성’의 하이브리드 전략을 모색 중이다.
국가별 ‘토종 EV 브랜드’ 탄생 가능성
거대 배터리업체 CATL은 최근 새 섀시 ‘베드록(Bedrock) Chassis’를 공개하며, “소비자가 EV의 형태를 결정하는 시대”를 선언했다. 이 시스템은 모듈을 조합해 국지적 취향이나 규제에 맞춘 차량을 3년 이내 양산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중동 투자회사 CYVN 홀딩스는 중국 니오(Nio) 기술을 활용해 자체 프리미엄 EV를 설계했으며, 지난 4월 영국 스포츠카 브랜드 맥라렌을 인수해 곧 맥라렌 배지를 달고 출시할 예정이다. 내부 소식통은 “향후 모델에서는 맥라렌의 브랜드 DNA를 강화하고 중국 기술 비중을 줄일 방침”이라고 전했다.
전문가 포레스트 투(Forest Tu) 전 CATL 임원은 “중국 기술 수출로 산업화 수준이 낮은 국가도 자국 EV 브랜드를 단기간 내 구축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이는 하드웨어뿐 아니라 소프트웨어·서비스까지 확장돼 ‘라이선스·로열티 경제’를 형성할 가능성이 크다.
용어 해설
화이트 라벨(White Label)은 제조사가 제품을 완성한 뒤 브랜드 로고가 없는 상태로 공급하고, 유통사가 자체 상표를 부착해 판매하는 방식이다. 자동차 분야에서는 섀시·모터·배터리 등 핵심 부품을 ‘무(無)브랜드’ 패키지로 제공해 완성차 업체가 자신들의 엠블럼만 붙이면 판매가 가능하다.
플랫폼은 차량의 기본 골격(프레임), 서스펜션, 전장 시스템 등을 통합한 ‘기초 설계도’다. 동일 플랫폼을 활용하면 차종·차급이 달라도 주요 부품을 공유해 생산 효율이 높아진다.
인포테인먼트는 정보(Information)와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의 합성어로, 내비게이션·음악·영상·차량 설정 등을 통합 관리하는 차량용 OS(운영체제)를 말한다.
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ADAS)은 레이더·카메라 센서를 활용해 차선 유지, 자동 긴급 제동, 주차 보조 등 안전 운전을 지원하는 기술이다.
전망
‘차이나 인사이드’ 모델은 당분간 전통 완성차와 중국 EV 스타트업의 이해관계를 일치시키는 ‘윈윈’ 구도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기술 종속이 심화될수록 브랜드 고유성 훼손·안보 리스크·지재권 분쟁 등 부작용도 커질 것이란 경고가 나온다.
궁극적으로는 글로벌 업체들이 중국으로부터 ‘학습 효과’를 흡수해 자체 역량을 재정비하는 동시에, 중국 기업들은 로열티 수익으로 해외 진출 비용을 상쇄하는 상호 보완적 생태계가 형성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