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 여력 없다”… 아르헨티나 대통령 하비에르 밀레이, 의회가 통과시킨 연금 인상·장애인 보호 강화 법안 전면 거부권 행사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하비에르 밀레이가 8월 4일(현지시간) 연금 인상안과 장애인 보호 강화를 위한 법안에 대해 전면 거부권(veto)을 행사했다고 대통령실이 공식 발표했다. 두 법안은 지난 7월 의회를 통과했으나, 밀레이 대통령은 “국가 재정 균형을 심각하게 위협한다”는 이유를 들며 서명을 거부했다.

2025년 8월 4일,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밀레이 대통령은 이미 한 달 전 “거부권을 행사할 방침”이라고 예고한 바 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의회는 그가 속한 자유지상주의(리버테리언) 정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므로, 의회가 재투표(재의결)로 거부권을 뒤집을 가능성*1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번 거부권은 3개월 남짓 앞으로 다가온 중간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단행됐다. 중간선거는 밀레이 행정부에 대한 국민적 ‘성적표’로 간주된다. 밀레이 정부는 고질적이던 연 100%가 넘는 인플레이션을 안정화하는 데 진전을 보였다고 주장하지만, 강도 높은 긴축정책으로 서민층의 생활고가 심화됐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대통령실은

법안이 “재원 조달 방안을 제시하지 않은 채 무책임하게 승인됐다”

고 지적했다. 행정명령 형태로 공포된 거부권 성명에서 대통령실은 다음과 같은 단호한 표현을 사용했다.

“이 대통령은 안락한 거짓을 반복하기보다 불편한 진실을 말하기를 택한다. 돈이 없다.”

용어 설명
거부권(Veto): 정부 형태별로 다소 차이는 있으나, 통상적으로 행정부 수반이 의회가 통과시킨 법률안에 서명하지 않고 무효화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한다. 아르헨티나 헌법상 의회가 정족수를 충족해 다시 표결하면 거부권을 무력화할 수 있다.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 정부 개입 최소화를 핵심으로 내세우는 정치·경제 사상으로, 세금 감면·재정 지출 축소·규제 철폐 등을 주장한다.


*1 아르헨티나 의회 구조: 상원 72석, 하원 257석으로 구성돼 있으며, 두 chambers 모두에서 2/3 이상의 찬성을 얻으면 대통령 거부권을 뒤집을 수 있다.

밀레이 대통령은 긴축정책 기조를 유지하며 “재정 흑자를 달성하기 전까지는 어떤 지출 확대도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이번 연금 인상안과 장애인 보호 강화 법안은 사회의 취약계층을 직접 겨냥한 조치였기에, 야당뿐 아니라 사회단체에서도 강력한 반발이 예상된다.

특히 아르헨티나 국민연금(ANSES) 수급자는 약 76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번 법안이 시행됐다면 최소 12% 이상의 급여 인상이 예정돼 있었다. 또한 장애인 보호 강화 법안은 장애인 고용 의무 할당보조기기 구매 지원 예산을 대폭 늘리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대통령 거부권 행사로 자동 폐기 수순을 밟게 됐다.

야당 의원들은 즉각 “가장 취약한 계층이 정치적 계산의 희생양이 됐다”고 비판했다. 노동조합과 인권단체 역시 대규모 주말 도심 시위를 예고한 상태다.

정치 분석가들은 “밀레이 대통령이 선거를 앞두고 ‘재정 건전성’ 이미지를 강화하려는 전략”이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그러나 경기 침체와 높은 실업률이 지속되는 가운데, 이번 결정이 유권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자료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공공부채는 GDP 대비 89% 수준까지 치솟았다. 밀레이 정부는 이를 2025년까지 80% 이하로 낮추겠다는 목표를 제시했지만, 국제통화기금(IMF) 프로그램 이행에 필요한 구조조정이 국민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연금과 장애인 예산은 사회안전망의 핵심 축”이라며, 지출 삭감에 따른 장기적 비용이 더 클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정부는 “재원 없는 복지는 결과적으로 더 큰 위기를 부를 뿐”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향후 관전 포인트는 의회가 재의결을 시도할지, 야권이 대통령 거부권을 무력화할만한 의석수(상·하원 2/3)를 확보할 수 있을지 여부다. 만약 의회가 실패할 경우, 사회적 긴장은 더욱 고조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