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로이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3년 넘게 지속되는 가운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6일(현지시간) 알래스카에서 잠정 휴전을 타결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전 세계 금융시장이 숨죽이고 있다.
2025년 8월 15일, 로이터 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이번 회담은 에너지·식료품 가격 급등, 유럽 자산 약세, 러시아 경제의 서방 금융망 탈피 등 지난 2년여 동안 시장을 뒤흔든 지정학적 충격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시장 참가자들은 합의의 세부 내용과 지속 가능성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
가이 밀러 취리히보험(Zurich Insurance Group) 수석시장전략가는 “휴전이 성사되더라도 안정성이 관건”이라며 “합의가 지속 가능할지, 아니면 일시적 휴전으로 그칠지가 시장 방향성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1. 유럽이 입은 상처
러시아산 저가 천연가스 의존도가 높았던 유럽은 에너지 가격 급등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특히 독일은 ‘유럽의 산업 심장’으로 불리지만 성장 동력이 멈추며 사실상 경기 정체 상태에 빠졌다.
에너지 비용에 민감한 산업재·화학 섹터가 직격탄을 맞았고, 유럽 은행주도 러시아 노출도를 축소하기 전까지 급락세를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범유럽 지수 STOXX 600은 3월 사상 최고치에 근접해 ‘최악은 지났다’는 분석도 나온다.
반대로, 방위산업주는 2022년 2월 이후 폭등장을 연출했다. 레오나르도는 600% 이상, 라인메탈은 1,500% 이상 상승했다. 토니 메도스 BRI 웰스매니지먼트 최고투자책임자(CIO)는 “휴전이 체결되더라도 푸틴과 트럼프라는 불확실성이 남아 있는 한 유럽의 방위비 지출 압력은 유효하다”고 진단했다.
2. 유가·가스 ‘폭등→조정’
침공 초기 국제유가 브렌트유(Brent)는 배럴당 139달러(+30%), 천연가스는 네덜란드 TTF 기준 300% 폭등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후 원유는 진정됐지만, 러시아 가스 수입 비중이 40%를 넘었던 유럽은 대체 공급처 확보에 나서며 가스 가격 변동성이 확대됐다.
현재 유럽은 미국산 LNG(액화천연가스) 의존도를 급격히 높이고 있다. 유럽연합(EU)은 2024년 750억 달러 규모였던 미국산 석유·가스·석탄 수입을 2027년 2,500억 달러로 늘리겠다고 약속했으나, 전문가들은 “*과도한 목표”라고 지적한다. 유·가스 가격은 2022년 고점 대비 낮지만 5년 전과 비교하면 각각 50%, 300% 높다.
※ 브렌트유는 북해산 원유를 기준으로 삼는 국제유가 벤치마크이며, TTF(Title Transfer Facility)는 네덜란드 천연가스 허브에서 거래되는 유럽 가스 선물가격을 뜻한다.
3. 통제 불능의 ‘인플레이션 지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인플레이션 압력은 전쟁으로 완전히 폭발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는 세계적인 곡물 수출국이지만, 전쟁으로 곡물 수급이 붕괴돼 식품 가격이 치솟았다.
연준(Fed)을 포함한 주요 중앙은행은 ‘일시적(transitory)’이라던 기존 인식을 철회하고 공격적인 금리 인상에 나섰다. 2022년 말 이후 물가와 금리는 둔화 국면이지만, 미국의 관세정책이 새로운 변수로 부상했다. UN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7월 세계 식료품 가격지수는 2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인사이트 인베스트먼트의 에이프릴 라루스 헤드는 “우크라이나 경제가 정상화되면 세계 식량 가격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4. 우크라이나·러시아 경제, ‘상처와 회복’
우크라이나는 전쟁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200억 달러 규모 국채를 재조정했다. 트럼프 재선이 평화협상을 중재할 것이란 기대에 국채 가격이 올랐다가, 2월 백악관 회동 이후 폭락하는 롤러코스터 장세가 이어졌다. 이번 주 들어 일부 낙폭을 만회했다.
러시아는 서방 제재로 침체에 빠졌지만, 국방 지출 확대 덕분에 2023~2024년 반등했다. 다만, 물가급등을 잡기 위한 금리 인상 후 경기침체 우려가 제기된다.
루블화는 침공 직후 사상 최저치로 추락했다가 2022년 말 7년 만의 최고치로 반등했다. 2025년 들어서는 달러 대비 40% 가까이 올랐다. 한편 러시아와 중국 간 결제 비중은 위안화가 달러를 제치고 1위가 됐다.
5. 뒤바뀐 환율 지형
유로화는 2022년 달러 대비 6% 떨어졌으나, 휴전 기대와 완화적 통화정책 조합이 단기 반등을 뒷받침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RBC 웰스매니지먼트의 프레데리크 캐리어 전략가는 “유로가 수혜를 볼 수 있지만, 통화정책 등 다른 요인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달러와 스위스프랑 같은 안전자산은 강세를 누렸고, 서방이 2022년 러시아 국부펀드 자산 3,000억 달러를 동결한 이후 ‘탈달러화(de-dollarisation)’ 흐름이 가속화됐다.
※ 탈달러화란 각국이 무역·금융 거래에서 달러 의존도를 낮추는 움직임을 의미한다.
전문가 시각 및 전망
시장 전문가들은 휴전 발표가 현실화될 경우 단기적 위험자산 랠리를 예상하면서도, 정치·군사적 불확실성이 상존하는 한 에너지·방위 등 구조적 트렌드는 유지될 것으로 본다. 특히 유럽은 대체 에너지 인프라 확충과 방위비 집행이 불가피해, 산업·방산 섹터의 중장기 매력도가 높다는 분석이 대두된다.
또한, 전쟁이 촉발한 인플레이션·통화정책 재편, 국제결제 통화질서 변화는 휴전 이후에도 글로벌 경제를 규정할 핵심 변수로 남을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