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중앙은행(Bank Indonesia·BI)이 9월 18일 전격적으로 기준금리를 인하하자 세계 금융시장은 놀라움과 불안이 뒤섞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투자자들은 이번 결정이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의 고성장 드라이브에 BI가 굴복한 결과가 아니냐는 의구심을 제기하며, 자칫 루피아화가 대규모 매도 압력에 노출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2025년 9월 19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이번 금리 인하는 로이터가 사전에 설문조사한 31명의 이코노미스트 전원이 “동결”을 예상했던 상황에서 단행돼 완전한 ‘깜짝 조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지난주 스리 물야니 인드라와티 재무장관이 전격 경질된 직후였던 만큼 재정·통화 정책 전반에 대한 신뢰 하락이 가속화될 것이라는 경계심이 커지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데 올인하고 있다.” — 하우 청 완, Principal 자산운용 아시아 채권부문 대표
1. 정치적 압박 논란과 중앙은행 독립성 시험대
프라보워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5%대에 머물러 있는 실질 GDP 성장률을 8%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야심찬 청사진을 제시해 왔다. 그는 농촌 기반 사회보장 확대, 인프라 투자, 보조금 확대 등 포퓰리즘적·재정집약적 공약을 앞세워 지지층 결집에 나섰다. 이번 금리 인하를 두고 시장 참가자들이 가장 크게 우려하는 부분은, 이 같은 정책목표 달성을 위해 BI의 ‘물가 안정’ 중심의 전통적 책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BI는 지난 12개월 동안 정책금리를 총 150bp(1.50%p) 인하해 왔다. 이번 추가 인하로 누적 175bp에 달하는 완화가 이뤄진 셈이다. 투자자들은 “독립성 훼손”, “정치 압력 가중”이라는 단어를 거듭 언급하며, 통화당국이 ‘성장’이라는 정치 목표를 위해 물가와 환율 안정이라는 전통적 책무를 등한시하는 상황이 현실화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2. 루피아화, 올해 아시아 최약체 통화로 전락
2025년 들어 루피아화는 미 달러 대비 약 3% 하락해 아시아 지역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4월에는 1달러=16,970루피아라는 사상 최저치를 찍었고, 9월 19일 현재도 16,585루피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BI는 올해에만 여러 차례 현·선물환 시장에 직접 개입하며 환율 방어에 나섰지만,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버든 셰어링(burden sharing)’ 제도도 통화가치 하락 요인으로 지목된다. 이는 중앙은행이 국채를 인수해 정부 지출을 지원하는 장치인데, 시장에서는 “잠재적 화폐 발행(재정 파이낸싱)을 수반해 루피아 가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3. 시장 반응 및 전문가 전망
런던의 운용사 Ninety One의 포트폴리오 매니저 마크 레저에번스는 “거시 지표상 인도네시아는 여전히 양호한 편”이라면서도, 루피아화에 대해서는 ‘언더웨이트(비중 축소)’ 전략을 유지한다고 밝혔다. 그는 “① 재정 적자, ② 정부 부채, ③ 경상수지 적자, ④ 인플레이션 등 핵심 지표가 안정적 수준이지만, 중앙은행이 추가로 완화정책을 펼칠 수 있다는 점이 리스크”라고 분석했다.
티로 프라이스(T. Rowe Price)의 신흥국 거시 전략 총괄 크리스 쿠슬리스도 “성장과 통화 안정 간의 균형이 명확히 충돌하는 순간, BI는 훨씬 더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한다”며 정치적 압박 리스크를 경고했다.
美 연방준비제도(Fed)가 최근 금리인하 사이클을 재개하면서 달러화가 단기적으로 약세 전환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루피아에 일시적 완충 작용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쿠슬리스는 “시장 참여자들은 BI가 통화가치 안정보다 성장에 무게를 둘 가능성을 이미 가격에 반영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운용사인 Driehaus Capital의 하위 슈밥은 “정책 변경에 대한 적극적인 소통이 부족해 위험 프리미엄이 당분간 높게 유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4. 수익률 곡선 왜곡…채권시장 ‘신경전’ 고조
4월 이후 인도네시아 국채시장의 1년물 대비 10년물 금리 스프레드는 37bp에서 120bp로 급등했다. 이는 2023년 1월 이후 최고 수준에 근접한 수치다. 긴 만기의 프리미엄이 커졌다는 것은 투자자들이 장기 재정·물가 리스크를 더 많이 반영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나틱시스(Natixis)의 신흥아시아 담당 수석이코노미스트 트린 응우옌은 “인도네시아는 오랜 기간 이어온 ‘재정 건전성·통화 안정’ 이미지를 시장 신뢰의 기반으로 삼아 왔다”면서, 이번 조치로 그 토대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5. 전문가 시각과 추가 설명
세계적으로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둘러싼 논쟁은 미 연준(Fed)이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 겪었던 정치적 압력 사례를 계기로 재점화됐다. 중앙은행 독립성은 ① 물가 안정, ② 장기 성장 기반 구축, ③ 시장 신뢰 확보라는 측면에서 핵심 거버넌스 요소로 간주된다.
‘버든 셰어링’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신흥국에서 채택된 비상대책 중 하나로, 중앙은행이 정부 발행 채권을 직접 매입해 재정지출을 지원하는 모형이다. 단기적으로는 재정 여력을 확충하지만, 과도한 국채 매입은 통화 팽창을 유발해 장기적인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일 수 있다.
이를 감안하면 BI가 국채 매입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동시에 기준금리를 인하하는 ‘이중 완화’를 지속할 경우, 루피아화 약세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다시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금리 인상 필요성을 초래하는 ‘정책의 부메랑’을 낳을 수 있다.
6. 향후 관전 포인트
① 10월 예정된 인도네시아 국회 정기회기에서 중앙은행법 개정이 논의될 경우 ‘정책 목표에 성장 명시’ 조항이 통과되는지 여부
② 루피아화 17,000선 방어를 위한 BI의 현·선물환 개입 빈도 및 규모
③ 4분기 소비자물가 상승률(CPI)이 3%대에서 4%대로 상승하는지 여부
④ 프라보워 정부가 성장 목표(8%) 달성을 위해 추가 재정 부양책을 발표할 가능성
투자자들은 이 같은 변수에 따라 자본 유출입, 국채 금리 스프레드, 통화스와프(CDS) 프리미엄 등 여러 지표를 면밀히 모니터링할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이번 BI의 깜짝 금리 인하는 인도네시아 경제의 성장 모멘텀을 단기적으로 자극할 수 있으나, 중앙은행 독립성 훼손과 루피아 약세 심화라는 부작용을 동반할 가능성이 크다. 전문가들은 “프라보워 정부가 성장·물가·환율 간 미묘한 균형점을 찾지 못하면 인도네시아가 지금까지 쌓아온 거시경제적 신뢰가 급속히 침식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