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란은행(BoE)이 자산 매각 속도를 완화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시장에서는 중앙은행이 보유 중인 5,580억 파운드 규모의 영국 국채(gilt) 가운데 연간 1,000억 파운드 수준으로 진행해 온 양적 긴축(Quantitative Tightening·QT) 계획을 재조정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2025년 7월 28일, 로이터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영란은행은 오는 8월 7일 통화정책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해 4%로 조정하는 동시에, 지난 1년간 수행한 QT 진행 상황을 종합 평가할 예정이다. 해당 평가 결과는 9월 회의에서 확정될 ‘차기 12개월 국채 매각·만기상환 계획’의 핵심 근거가 될 전망이다.
시장 불확실성 확대와 금융 시스템 내 초과 유동성의 빠른 소진이 맞물리며, QT의 속도와 방식에 대한 논란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특히 최근 국채 수익률 급등과 유동성 균형점 접근은 2008년 금융위기 이전 이후 처음 등장한 변수로 평가된다.
■ 정치·시장압력 가중…“배경에서 진행되는 정책만은 아니다”
영란은행이 보유 자산을 처분하면서 발생한 손실 규모가 커지자 정치권 압박도 거세다. RBC의 글로벌 매크로 전략가 피터 샤프릭은 “
영란은행은 QT를 백그라운드에서 조용히 수행되는 기술적 작업으로 보고 싶어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은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고 지적했다.
실제로 영란은행의 QT는 미국·유럽 등 주요 중앙은행과 달리 경매 방식의 ‘능동적 매각’과 ‘만기 도래 채권의 소극적 상환’을 병행한다. 지난 1년간 BoE는 직접 매각으로 130억 파운드, 만기 상환으로 870억 파운드를 축소해 총 1,000억 파운드 규모를 줄였다. 그러나 향후 12개월 안에 같은 속도를 유지하려면, 만기 도래 물량 감소로 인해 사상 최대치인 510억 파운드를 시장에서 팔아야 한다.
샤프릭은 “시장 상황이 2024년 9월까지 500억 파운드를 팔았던 때와는 판이하다”며 대규모 매각 시 시장 충격이 확대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영란은행 측은 지금까지의 매각이 장기금리를 ‘거의’ 올리지 않았다고 설명하지만, 최근 영국 30년 만기 국채금리가 1998년 이후 최고치로 치솟은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 투자자 인식 변화: 연간 750억 파운드→500억 파운드로 속도 저하 예상
5월 공개된 영란은행 투자자 설문조사에 따르면, 금융시장은 오는 9월부터 연간 750억 파운드 수준으로 QT 속도가 완만해지고 2026~2027년에는 500억 파운드까지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이 경우 2028년경에는 ‘능동적 매각’이 사실상 종료될 수 있다는 시나리오가 제시된다.
BNP파리바의 유럽 담당 이코노미스트 다니 스토일로바는 더욱 급진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는 “10월부터는 시장 충격을 방지하기 위해 BoE가 국채 매각을 전면 중단할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추가 관세 발언(4월) 이후 금융시장 변동성이 확대되면서, 영국 30년물 국채금리는 연고점을 찍었고 BoE는 예정된 국채 매각을 연기해야 했다. 5년물과 30년물 금리 차이는 1.4%포인트로 두 배 이상 벌어졌고, 2년·10년물 스프레드도 거의 0에 가까웠던 수준에서 0.75%포인트까지 가팔라졌다.
스토일로바는 “기준금리가 하락하는 환경에서 능동적 QT가 수행된 전례는 없다”면서, 금리와 매각 사이의 미지의 상호작용이 위험을 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 ‘QT 책임 없다’는 베일리 총재…그러나 장단기 금리차 확대는 부담
앤드루 베일리 영란은행 총재는 최근 “정부 차입 비용 상승은 QT 때문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다만 그는 “
수익률 곡선 변화가 QT, 시장 기능, 통화정책 효과와 어떻게 결합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 강조했다.
전 영란은행 통화정책위원(MPC)인 마이클 손더스는 BoE가 20년 이상 장기물 매각을 중단하거나 단기물 중심으로 전략을 바꿀 수 있다고 진단한다. 반면 산탄데르 CIB의 영국 금리 전략 총괄 애덤 덴트는 “QT가 수익률 곡선 기울기에 미친 영향은 제한적”이라며 추가 금리 인하가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밝혔다.
■ 장기 청사진 ‘안갯속’…은행 준비금·레포 활용도 관건
현재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예치한 지급준비금(reserve)은 약 6,800억 파운드로, BoE가 업계 설문을 통해 파악한 ‘최소 선호 구간’(3,850억~5,400억 파운드)을 크게 상회한다. 베일리 총재는 QT를 통해 초과 준비금을 단계적으로 흡수한다는 입장이지만, 일각에서는 은행들이 BoE 레포(Repo·환매조건부채권) 이용을 늘리는 추세를 근거로 ‘준비금 마지노선’이 예상보다 가까울 수 있다고 본다.
샤프릭은 “BoE가 정확한 목표치를 제시한 적은 없으나, 결과적으로 준비금 수준을 상당 폭 더 끌어내리려는 의도가 엿보인다”며 “향후 매각 속도를 완화하거나 시장 상황을 보며 신중히 접근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용어 설명: 양적 긴축·레포란 무엇인가?
양적 긴축(QT)은 중앙은행이 과거 양적 완화(QE)를 통해 매입했던 자산(주로 국채·회사채)을 매각하거나, 만기에 따라 상환받아 대차대조표를 축소하는 정책이다. 이는 시중 유동성을 흡수해 통화량을 줄이고, 인플레이션 압력을 완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레포(Repo)는 금융기관이 보유 채권을 중앙은행에 담보로 맡기고 단기 자금을 빌린 뒤, 일정 기간 후 다시 채권을 되사는 형식의 유동성 공급 창구다. 준비금이 부족해질 때 은행들은 레포를 통해 자금을 확보할 수 있으며, 중앙은행 입장에서는 금융시장의 안정적 자금 흐름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 기자 해설: 차별화된 영란은행 QT, 향후 관전 포인트
시장 참가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대목은 ‘QT 속도 조절’과 ‘금리 인하’가 동시 단행될 경우 나타날 수 있는 파급효과다. 장기물 발행 비용이 이미 크게 뛰어오른 상황에서 BoE가 대규모 국채 매각을 계속할 경우, 수익률 곡선 스티프닝(steepening) 현상이 심화될 수 있다.
반대로 매각 속도를 느리게 하거나 장기물 매각을 중단하면, 초과 준비금 흡수 속도가 지연돼 통화정책 효과가 약화될 수도 있다. 이에 따라 금융시장에서는 BoE가 8월 회의에서 제시할 ‘QT-금리’ 조합의 세부 시나리오를 면밀히 살피며, 국채 입찰 수요, 스와프 금리, 포워드 가이던스 등 연계 지표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영란은행의 전략은 ‘인플레이션 억제’와 ‘시장 안정’이라는 두 축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고난도의 줄타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향후 몇 달간 발표될 매각 캘린더, 준비금 잔액, 레포 이용률 추이가 정책 판단의 열쇠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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