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손모빌(Exxon Mobil)이 미국 상장사 최초로 개인투자자 대상 ‘자동 의결권 위임(auto-voting)’ 메커니즘을 공식 도입한다. 회사 측은 이 서비스가 소액주주 의결권 참여 장벽을 낮추고, 동시에 반(反)경영진 주주 행동주의 캠페인에 대응하는 중요한 수단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25년 9월 15일, 인베스팅닷컴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전일(9월 14일) 엑손모빌이 제출한 ‘자동 의결권 위임 프로그램’에 대해 “특정 조건 준수 시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발송했다. 따라서 엑손모빌은 정기주주총회(proxy season)에서 이사회 권고안과 동일한 방향으로 표를 자동 행사하려는 개인주주들을 모집할 수 있게 됐다.
SEC가 제시한 조건은 △가입 주주에 대한 매년 사전 안내 및 확인 절차 △언제든 수동 투표로 전환할 수 있는 선택권 보장 등이다. 규제기관이 공식적으로 ‘무대응’ 입장을 내놓았다는 점은, 향후 다른 대형 상장사에도 유사 서비스 확산을 촉발할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엑손모빌은 성명에서 “개인투자자는 기관투자자가 누리는 간편 투표 솔루션에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을 행동주의 그룹이 이용해 정치·사회적 어젠다를 관철하고 있다”면서 “공정한 경쟁의 장을 마련하기 위한 조치”라고 강조했다.
현재 엑손모빌 발행주식 중 약 40%가 개인주주 몫이지만, 정작 주총 투표율은 25% 남짓에 불과하다. 지난해 기준 미 대형 상장사의 평균 개인지분율이 30% 수준임을 감안하면, 엑손모빌은 ‘개인주주 비중이 이례적으로 높은 종목’으로 꼽힌다. 애플·테슬라 등 일부 초대형 테크기업 정도만 이와 유사한 구조를 보유한다.
주주 행동주의에 맞선 ‘공격적 방어 전략’
엑손모빌이 자동 의결권 위임을 추진한 배경에는 최근 잇따른 행동주의 세력과의 충돌이 자리한다. 2021년 기후변화 이슈를 고리로 ‘액티비스트 헤지펀드’ 엔진넘버원(Engine No.1)이 주도한 위임장 대결에서 반대파가 이사 3명을 이사회에 진입시키는 이례적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에도 네덜란드 비영리 단체 ‘팔로우디스(Follow This)’, 미국 지속가능투자펀드 ‘아르주나 캐피털(Arjuna Capital)’ 등이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을 요구하는 주주제안을 연이어 제출했다.
엑손모빌은 작년 해당 제안이 철회된 뒤에도 원고를 상대로 소송을 유지하는 등 ‘선제적·공세적’ 대응 기조를 유지했다. 결국 2024년 5월 연례주총에는 1958년 이후 처음으로 단 한 건의 주주제안도 상정되지 않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CEO의 공개 발언
지난주 오스틴 에너지 콘퍼런스에서 대런 우즈(Darren Woods) CEO는 “동일한 의제가 매년 반복 제출되는 악순환을 반드시 끊어야 한다”면서 “게임을 걸어오면 우리도 응수할 준비가 돼 있다”는 강경 발언을 내놓았다.
프로그램 작동 방식과 개인주주 영향
이번 서비스는 브로커리지(증권사) 시스템에 연동돼 무상 제공된다. 가입 주주는 주총 의안이 공시되는 즉시 ‘경영진 찬성’으로 자동 투표가 이뤄지며, 별도 온라인 포털이나 우편 투표지를 통해 언제든 선택을 수정할 수 있다. 회사 측은 이후 매년 1회 ‘참여 여부 재확인 이메일’을 발송한다.
투자·지배구조 전문가 시각*1에 따르면, 기관투자자 비중이 높은 미국 주총 시장에서 소액주주의 자동 투표는 ‘여당 표 결집 효과’*2를 낳을 공산이 크다. 행동주의 펀드가 경영진에 맞서 이사 후보를 추천하거나 기후·노동 관련 이념형 주주제안을 내놓을 경우, 단 몇 퍼센트포인트 차이로 승패가 갈리는 사례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1 여기서 ‘지배구조 전문가’는 대학·싱크탱크 연구자, 자산운용사 거버넌스 팀 관계자를 통칭한다.
*2 ‘여당 표’는 통상 기업 경영진·이사회의 입장을 지지하는 표를 의미한다.
용어 설명: ‘프락시(proxy) 시즌’과 ‘자동 의결’
프락시는 위임장을 뜻한다. 미국 상법상 주주는 물리적으로 주총장에 참석하지 않아도, 사전에 배포된 ‘프락시 서류’를 통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매년 4~6월을 ‘프락시 시즌’이라 부르는데, 대부분 기업의 12월 결산이 마무리된 뒤 정기주총이 집중돼 있다. ‘자동 의결’은 투자자가 특정 투표정책(경영진 찬성·ESG 강화·중립 등)을 미리 지정해 놓고, 시스템이 알아서 표를 던지는 구조를 말한다.
시사점 및 전망
SEC가 ‘문제없다’는 유권해석을 내놓으면서, 다우지수 편입 대형주·테크기업 등도 유사 프로그램을 검토할 가능성이 커졌다. 특히 소액주주 비중이 20% 이상인 기업에게는 ‘사전 지지표’ 역할을 할 수 있어, 경영권 분쟁·ESG 주주제안 공세를 예방하는 방패막으로 기능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행동주의 진영은 ‘의결권 집중’이 거버넌스 투명성·책임성 저하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실제 일부 ESG 펀드는 최근 ‘투표권 고객 귀속(move your vote)’ 캠페인을 벌이며, 대형 자산운용사가 해당 모듈을 제공할 때 동일하게 환경·사회 의제를 선택할 수 있도록 요구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엑손모빌 사례는 규제기관·기업·투자자 3자 간 권한 배분에 관한 새로운 선례가 될 전망이다. 향후 자동 의결권 위임 프로그램이 미국 외 지역, 특히 기관·국민연금 의존도가 높은 한국 기업지배구조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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