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머 英 총리, 예산안 앞두고 ‘근로자 증세 불가’ 공약 답변 보류

【런던】 영국 총리 키어 스타머(Keir Starmer)가 다음 달 예정된 예산안을 앞두고 근로 계층에 대한 세금 인상은 없을 것이라는 과거 약속을 재확인하지 않았다. 그는 영국 경제 상황이 기존 예상보다 악화됐다는 새로운 전망치를 근거로 들며 구체적인 세제 방침은 예산안 발표 때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2025년 10월 29일,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스타머 총리는 이날 하원 총리 질의응답(PMQs)에서 보수당의 케미 바데녹(Kemi Badenoch) 대표가 “소득세·국민보험·부가가치세(VAT)를 올리지 않겠다던 약속을 지킬 것인가”라고 묻자 직접적인 ‘예스’ 답변을 피했다.

바데녹 대표는 “올해 7월 같은 질문을 했을 때 총리는 단 한 단어, ‘그렇다(Yes)’라고 답했다”고 상기시키며 거듭 추궁했다. 그러나 스타머 총리는 “예산안은 오는 11월 26일에 발표될 예정이며, 지금 사전 공개할 수 없다”고 일축했다. 그는 이어 “생산성 전망 하향은 지난 14년간 보수당 정권이 경제에 가한 손상을 입증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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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 전망 하향 조정이 의미하는 것

영국 예산책임처(OBR) — 국가 재정 전망을 공식 추계하는 독립 기구 — 가 생산성(growth in output per hour) 전망치를 0.3%포인트 추가 하향할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 모델상 생산성은 세수와 잠재성장률에 직접 영향을 주는 핵심 변수다. 예상보다 큰 폭의 하향 조정은 추가로 200억 파운드(약 26억 8,000만 달러)에 달하는 공공재정 공백을 의미한다.

생산성 하락은 단순히 ‘노동자가 덜 일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동일 시간에 창출하는 경제적 가치가 줄어들면 법인세·소득세 기반이 좁아져 정부 세입이 감소하고, 그 결과 사회복지 지출·국방비·보건예산을 충당하기 위한 재원 압박이 커진다.

레이철 리브스 재무장관의 딜레마

재무장관 레이철 리브스(Rachel Reeves)는 2030년까지 ‘경상지출(balancing day-to-day spending)과 세입 균형’이라는 적자 제로 목표를 고수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그러나 생산성 추락이 현실화될 경우 지출 감축만으로는 목표 달성이 어렵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 때문에 소득세율·국민보험률·VAT 세율 가운데 하나 이상을 손대야 한다는 관측이 나온다.

“세목을 건드리지 않고 재정 균형을 이루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 영국 국립경제사회연구소(NIESR) 수석 이코노미스트

정부는 ‘근로자 증세는 없다’는 기존 방침을 유지하면서도 비(非)근로소득 과세 — 예컨대 증권 양도소득세(CGTx), 대형 부동산 보유세 — 신설·강화를 검토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재계에서 제기된다. 그러나 구체적 방안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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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당과 노동당의 정치적 신경전

보수당은 “노동당이 결국 증세 카드로 돌아설 것”이라며 총공세를 펼치고 있다. 실제로 영국 근로자의 가처분소득은 2022~2024년 평균 7% 감소한 것으로 집계돼, 추가 증세가 현실화될 경우 민심 악화가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많다.

반면 노동당 측은 “생산성 하락·재정 적자는 보수당 14년 집권의 결과”라며 책임론을 부각한다. 스타머 총리는 이날도 “‘보수당 트라우마’를 치유할 유일한 방법은 구조적 개혁과 지속적 투자를 병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 시각·시장 반응

파운드화는 이날 원내 질의응답 직후 달러 대비 0.2% 약세를 보였다가 오후 들어 낙폭을 회복했다. 국채시장에서는 10년물 금리가 6bp(베이시스포인트) 하락, ‘안전자산 선호’ 움직임이 엿보였다. 이는 투자자들이 경기 모멘텀 둔화를 선반영하며 채권을 매수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옥스퍼드 이코노믹스 연구진은 “세법 개정이 현실화되면 금융시장이 일시적으로 흔들리겠지만, 중기적 재정건전성을 확보해 신용등급이 방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순(純)호재로 볼 수도 있다”라고 평가했다.

용어 풀이

△ 국민보험(National Insurance) : 영국에서 사회보장제도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근로자와 고용주가 납부하는 준조세다. 한국의 건강보험료·연금보험료와 유사하다.

△ OBR(Office for Budget Responsibility) : 우리나라의 국회예산정책처 또는 기획재정부 산하 재정준칙위원회에 해당하는 독립 기관으로, 정부 재정 전망과 경제전망을 공식 발표한다.

향후 일정 및 관전 포인트

11월 26일 예산안 발표까지 정부·야당·재계 간 공방은 이어질 전망이다. 특히 생산성 향상 대책재정 흑자 로드맵이 구체적으로 제시될지, 그리고 ‘근로자 증세’가 포함될지가 투자자와 유권자의 초미 관심사다.

결국 스타머 총리가 2024년 총선 과정에서 내건 ‘성장·투자·공정’ 3대 슬로건은 이번 예산안에서 첫 시험대를 맞는다. 정부가 경제성장과 재정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지, 아니면 유권자 신뢰를 저버리는 결과로 귀결될지 — 시장과 국민은 결과로 평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