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의회, 경쟁력 우려로 자금세탁방지 법안 완화 추진

[취리히] 스위스 연방의회가 정부가 제출한 자금세탁방지(AML) 강화 법안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의원들은 “국제 자산관리 시장에서 싱가포르·아랍에미리트(UAE) 등 경쟁 금융허브가 급부상하는 상황에서, 과도한 규제는 스위스의 경쟁력을 훼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025년 9월 11일,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스위스는 현재 세계 최대 크로스보더 자산관리 허브이지만,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이르면 올해 그 지위를 상실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스위스산 수입품에 39% 관세를 부과한 이후, 스위스 정계에서는 경제적 타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에 따라 자금세탁방지 드라이브를 속도 조절해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고 있다. 동일한 논리는 UBS의 새로운 자본규제 논쟁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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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F 요구사항 vs. 스위스 의회

정부가 마련한 개정안은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가 요구한 페이퍼 컴퍼니(유령회사) 투명성 규정을 국내법에 반영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바르바라 슈타이네만(우파 SVP·스위스국민당) 의원은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스위스는 외국의 투명성 압력에 수년간 성실히 따랐지만 그 대가로 행정비용이 급증하고 경쟁력이 약화됐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는 금융허브 간 주도권 전쟁”이라며 “미국과 유럽이 우리의 비즈니스를 탈취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스위스는 2024년 OECD 글로벌 최저 법인세 15%최종 바젤Ⅲ 기준을 선제 도입했다. 정부는 이를 통해 국제 신뢰도를 확보했다고 자평하지만, 의회 다수는 “우리가 먼저 몸을 줄 필요가 없다”며 선(先) 경쟁력, 후(後) 규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의원들의 구체적 완화 조치

의회는 범죄 연루 가능성이 높은 변호사·트러스티 등 금융자문인의 실사 의무를 제한하고, 투명성 등록부 대상에서 자선 단체 및 비영리 조직을 제외했다. 카린 켈러-주터 재무장관은 “트러스트 구조는 실소유자 은폐 위험이 크다”며 반대했지만, 상·하원 모두 예외 조항을 통과시키면서 사실상 정부안을 축소했다.

중도우파 자유당(FDP)의 시모네 지아니니 의원은 “투명성 추진이 과잉규제로 변질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중도당(The Centre) 비트 리더 의원도 6월 본회의에서 “우리가 통과시키는 법은 끝까지 집행된다”며 “이미 스위스의 자금세탁방지 시스템은 다른 금융허브보다 정교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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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아시아 경쟁 심화

BCG에 따르면 2024년 전 세계 주요 금융허브의 크로스보더 자산 성장률은 스위스를 앞질렀다. 싱가포르는 11.9%로 가장 빠르게 성장했고, 홍콩은 2025년 세계 1위 예약센터로 부상할 전망이다. 반면 스위스는 세컨더리 허브로 밀릴 가능성이 제기된다.

“경쟁력 논리로 규제를 완화하면, 오히려 범죄 자금 유입 허브로 전락할 수 있다.” — 안톤 브뢰니만, 스위스 연방경찰청 금융범죄수사국장

영국 비영리단체 택스저스티스네트워크에 따르면 스위스는 금융비밀지수 세계 2위로, 여전히 높은 은닉성을 유지한다. 스위스 금융당국은 “효과적인 AML 체계는 국제 신뢰의 핵심”이라며 의회의 완화 움직임에 간접적으로 우려를 표했다.


전문가 진단 및 전망

국제 규제전문가들은 스위스가 “선제적 규제 완화를 통해 단기 고객 유치를 꾀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평판 리스크가 더 큰 비용을 야기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EU·미국의 보복성 제재가 재차 부과될 경우, 국내 금융사들이 겪을 법적·재무적 부담이 막대하다는 분석이다.

KPMG 스위스의 한 파트너는 “UBS·크레디스위스 합병 이후 스위스 은행업이 이미 규제 피로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지만, 글로벌 스탠더드에 뒤처지는 순간 초고액자산가(HNWI)는 규제가 적은 지역이 아니라, 법적 안정성이 높은 곳으로 이동한다”고 밝혔다.

스위스 의회는 이번 주 하원 회의에서 자문인 실사 범위 조정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통과 즉시 법안은 시행령 작업에 돌입하지만, 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하거나 국민투표로 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용어 설명

FATF(Financial Action Task Force)는 1989년 G7 정상회담에서 창설된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로, 각국의 AML·테러자금조달방지(CFT) 기준을 감독한다.

바젤Ⅲ는 글로벌 은행 자본·유동성 규제협약으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위험가중자산(RWA) 산정 방식을 강화했다. 이번 기사에서 언급된 “최종 바젤Ⅲ”는 2023~2025년 단계적 도입 예정인 마지막 패키지를 의미한다.

OECD 글로벌 최저 법인세는 연 매출 7억5,000만 유로(약 1조 원) 이상 다국적기업에 대해 최소 15%의 실효세율을 부과하는 국제 조세 협약이다. 조세 회피를 방지하고 경쟁적 세율 인하를 막는 것이 목적이다.


기자 전망

스위스가 규제 완화국제 신뢰라는 양날의 검 사이에서 어떤 균형점을 찾을지가 글로벌 금융시장의 관심사다. 향후 FATF 상호평가에서 “부분적 불이행” 판정을 받을 경우, 미국·EU의 상대적 제재가 현실화될 수 있다. 반면 의회의 완화 전략이 단기적으로는 자산 유치에 성공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종 결과는 오는 연말 합동위원회 조정안에서 가시화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