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최대 소매·도매 에너지 기업인 센트리카(Centrica)가 자회사 브리티시 가스(British Gas)를 통해 미국의 독립 석유·가스 기업 데번 에너지(Devon Energy)와 장기 천연가스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고 16일 밝혔다. 이번 계약에 따라 데번 에너지는 2028년부터 2037년까지 매년 액화천연가스(LNG) 약 5척(카고) 규모를 센트리카에 공급하게 된다.
2025년 8월 15일, 로이터 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센트리카 측은 “계약 물량이 향후 영국 및 유럽의 에너지 안보 강화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것”이라며, 구체적인 가격 조건은 상업상 비밀을 이유로 공개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센트리카는 영국 FTSE 100 지수에 편입된 대표적인 에너지 기업이며, 브리티시 가스 브랜드로 가정·기업용 가스 및 전력을 공급한다. 데번 에너지는 미국 오클라호마주 오클라호마시티에 본사를 둔 독립 탐사·생산(E&P) 회사로, 페름분지와 딜라웨어분지 등지에서 셰일가스 및 원유를 생산한다.
용어 설명
‘LNG 카고’ 1척은 통상 160,000~180,000㎥(약 3.5~4.0 bcm)의 액화천연가스를 선적할 수 있는 크기를 의미한다. 계약상 “연 5척”이라는 표현은 연간 약 20억㎥ 이상의 가스를 공급받는 셈으로, 이는 영국 가정 약 200만 가구가 1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규모다.
계약의 전략적 의미
최근 영국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북해 가스 생산 감소와 노르웨이 공급 차질, 도매가격 변동성 확대 등 복합 문제를 겪었다. 유럽 전역이 LNG 수급 다변화에 몰두하는 가운데, 장기 계약은 취약한 스팟(현물) 시장 의존도를 완화하고 비용 예측력을 높인다.
센트리카는 이미 카타르와 미국의 다른 생산업체로부터 연 900만 톤(t)의 LNG 장기 물량을 확보했으나, 이번 데번 계약으로 미국 내륙 셰일가스 기반 물량에 대한 비중을 추가 확대하게 됐다. 회사 측은 “리스크 분산 효과가 크다”고 강조했다.
미국에도 이점이 있다. 미국 생산업체들은 최근 FERC(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의 수출 허가 지연과 글로벌 수요 둔화 우려로 불확실성이 커졌다. 데번 에너지 입장에서는 유럽·영국 소비자에게 10년간 안정적인 판매처를 확보해 캐시플로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
시장 반응
전문가들은 “장기 물량이 시장 평균 LNG 스프레드를 줄여 영국 도매가스 가격 안정에 기여할 것”으로 본다. 다만, 천연가스 가격이 2028년 계약 개시 시점까지 하락할 경우 오히려 계약 가격이 시장가보다 높아지는 리스크도 지적된다.
장·단기 가격 구조
스팟 거래는 즉시 수요 충족에 유리하지만, 지정학적 변수에 민감하다. 반면 장기 계약(long-term offtake)은 가격 변동을 완충하는 대신 계약기간 동안 유연성이 떨어진다. 이번 합의에서도 ‘Take-or-Pay(구매 의무) 조항’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유럽 가스 허브(네덜란드 TTF) 가격은 2022년 한때 MWh당 340유로를 돌파해(사상최고) 스팟 거래의 위험성을 드러냈다. 센트리카는 ‘2028년부터 계약’이라는 시간적 여유를 통해 FID(최종투자결정) 단계의 미국 수출터미널 용량 증가 예상과 맞물려 상대적으로 유리한 가격 조건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공급망·운송 측면
영국의 최대 LNG 도입 항만은 사우스훅(South Hook)·아일랜드(South Pier)·그레인(Isle of Grain) 등이다. 센트리카는 해당 터미널 슬롯 예약 계약을 이미 보유하고 있어, 데번 에너지 카고가 도착할 때 추가 인프라 투자가 필요하지 않다. 이는 총 소요 비용(CAPEX) 절감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탄소중립 및 ESG 고려사항
영국 정부는 2050 탄소중립(Net Zero) 목표를 설정했으나, 천연가스는 전환기 에너지원으로 여전히 필수적이다. 센트리카는 “Scope 3 배출 관리 강화를 위해 탄소포집·저장기술(CCS) 및 메탄 배출 저감 프로그램을 병행 추진할 것”이라 밝혔다.
전문적 시각
필자는 이번 계약이 ‘공급 안보를 강화하면서도 비용 효율성을 확보하려는 이중전략’이라고 평가한다. 영국은 북해 가스 고갈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며, 재생에너지 비중 확대로도 겨울철 피크 수요를 단기간에 대체하기 어렵다. 따라서 미국산 LNG와 같은 ‘탄력적 공급원’을 일정 부분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동시에 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시행을 고려하면, 메탄 슬립 규제가 향후 비용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미국 LNG 수출 인프라의 확장은 헨리허브(미국 천연가스 가격 지표)를 글로벌 벤치마크로 부상시킬 수 있다. 이번 계약이 영국-미국 간 에너지 협력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양국 관계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결론적으로, 센트리카와 데번 에너지의 10년 장기 계약은 영국 가스시장 구조 안정, 미국 자원 개발사의 매출 기반 확대, 글로벌 LNG 거래 패턴 변화 등 다층적 파급효과를 내포한다. 계약 발효 시점인 2028년까지 국제 천연가스 시장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또한 장기·단기 가격 괴리가 어느 정도 발생할지가 향후 관전 포인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