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발(로이터)—이번 주 유럽 증시에서 인공지능(AI) 기술을 적극 도입해 온 기업들의 주가가 다시 한 번 급락했다. GPT-5 등 강력한 신형 AI 모델이 잇따라 공개되면서 소프트웨어부터 데이터 분석에 이르는 산업 전반이 기존 사업모델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우려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2025년 8월 15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독일의 SAP와 프랑스의 다쏘시스템을 비롯한 유럽 소프트웨어주가 12일(현지시간) 대거 하락했다. 이는 전날 미국 소프트웨어 경쟁사 어도비에 대해 멜리어스 리서치가 투자의견 하향을 제시한 데 이어, AI가 소프트웨어 산업을 뒤흔들 것이라는 공포가 시장 전반으로 확산된 결과다.
7월 중순 이후 런던증권거래소그룹(LSEG)의 주가는 14.4%, 영국 소프트웨어 업체 세이지(Sage)는 10.8%, 프랑스 IT 컨설팅 기업 캡제미니(Capgemini)는 12.3% 각각 하락했다.
애널리스트들은 이들 기업을 ‘AI 채택주(adopter)’라고 부르며, 이들이 제품·서비스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AI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 왔다고 설명한다. 유럽에는 아직 본격적인 AI 원천기술 및 부품 공급사가 부족하기 때문에, 투자자들은 이들 채택주를 통해 미국발 AI 열풍에 간접적으로 올라타려 해 왔다.
그러나 더욱 강력한 AI 도구가 속속 공개되자 일부 기관투자가들은 전술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지난주 오픈AI는 GPT-5를 출시했다. 2022년 말 챗GPT가 등장한 이후 글로벌 비즈니스와 문화를 송두리째 바꿔놓은 핵심 기술의 최신 버전이다.
자산운용사 아비바 인베스터스의 펀드매니저 쿠날 코타리는 7월 15일 발표된 앤스로픽의 ‘클로드 포 파이낸셜 서비스’ 역시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새로운 애플리케이션이 등장하면서 LSEG의 금융 데이터 사업에 대한 투자 논리가 도전을 받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GPT나 클로드의 새 버전이 나올 때마다 전 세대 대비 수배 수준으로 성능이 향상된다. 시장은 ‘잠깐, 이건 저 비즈니스 모델을 위협하겠는데’라고 생각한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유럽 채택주의 급락은 지수 상승세와 대조를 이룬다. 7월 중순 이후 런던 FTSE100 지수는 2.5%, 범유럽 STOXX600 지수는 0.6% 올랐다. 같은 기간 미국 주요 지수는 기술주 덕에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UBS 오코너 헤지펀드의 최고투자책임자 버니 아콩(Bernie Ahkong)은 높은 밸류에이션이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높은 주가수익비율(PER)을 적용받는 종목은 작은 악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STOXX600의 평균 PER은 17배이지만, SAP는 약 45배에 거래된다. SAP 주가는 7월 중순 이후 7.2% 떨어졌으며, 13일에는 2020년 말 이후 일일 최대 낙폭을 기록하기도 했다.
AI가 ‘소프트웨어를 집어삼킬 것’인가?
많은 AI 채택주가 고전하고 있지만, 일부 투자자들은 결국 시장이 승자와 패자를 가려낼 것이라고 본다.
“지금은 마치 시장이 총부터 쏘고 나서 모든 종목을 ‘위험 바스켓’에 담아버린 것 같다”고 코타리는 영국 채택주 하락에 대해 말했다.
신형 AI 모델에 대한 열풍 속에, 2017년 엔비디아의 CEO 젠슨 황이 남긴 “AI가 소프트웨어를 먹어 치울 것이다”라는 발언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우리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소프트웨어 기업이 동일한 수준으로 노출된 것은 아니다”라고 라자드 자산운용의 글로벌 테마주 포트폴리오매니저 스티브 레포드는 설명했다.
그는 고객사의 업무 프로세스에 소프트웨어가 깊숙이 통합돼 있거나, 모방하기 어려운 독점 데이터를 보유한 기업은 여전히 강력한 경쟁 우위를 유지한다고 분석했다.
슈로더의 테크놀로지 분야 글로벌 스페셜리스트 패디 플러드는 “소프트웨어 종류별로 리스크가 다르다는 점을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용(엔터프라이즈) 애플리케이션은 업무 수행에 필수적이고 교체 과정이 복잡하며, 신뢰할 수 있는 벤더가 지속적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덜 노출돼 있다”고 그는 말했다.
코타리는 또한 영국 신용정보 회사 엑스페리언(Experian)을 예로 들며, 고객 워크플로에 깊이 자리 잡은 소프트웨어의 장점을 거론했다.
“엑스페리언은 자체적인 방대한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금융기관 업무 과정에 필수적으로 통합돼 있다. 대출을 하려면 엑스페리언을 써야 한다”면서 영국 세이지도 함께 언급했다.
그는 엑스페리언, 세이지, LSEG 세 종목을 모두 보유하고 있지만, 독점 데이터만으로는 더 이상 방어막이 되지 못한다고 경고했다.
“데이터만으로는 충분한 해자(방어벽)가 되지 않는다”라고 그는 단언했다.
UBS 오코너의 아콩은 채택주 하락세가 옥석 가리기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영향을 받은 기업 중 일부는 AI를 활용해 실적을 끌어올리는 추진력(Tailwind)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를 증명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기업들이 가질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넉넉하지 않다. 올해 초부터 이미 일부 투자자들은 AI에 대규모로 지출하는 기업들이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할 시간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고 경고해 왔다.
[용어 해설] PER(주가수익비율)은 주가를 주당순이익(EPS)으로 나눈 값으로, 회사의 이익 대비 주가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다. 값이 높을수록 향후 성장 기대가 크지만, 동시에 악재에 취약해질 수 있다. 또한 ‘워크플로(Workflow)’는 기업의 업무 흐름을 의미하며, 소프트웨어가 워크플로에 깊이 통합돼 있을수록 교체 비용이 커진다.
[전문가 시각] 본 기사는 투자 판단을 돕기 위한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개별 종목에 대한 매수·매도 추천이 아니다. AI 기술 발전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는 만큼, 투자자는 각 기업의 기술 적응력과 수익 모델을 면밀히 검증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