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발렌티노(Valentino)의 최고경영자(CEO) 야코포 벤투리니(Jacopo Venturini)가 전격 사임했다. 회사는 15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벤투리니가 “개인적인 이유로 휴식이 필요하다”며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공식 발표했다.
2025년 8월 14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발렌티노는 벤투리니와 상호 합의(mutual agreement) 하에 고용 계약과 이사회 직책을 8월 13일부로 종료했다. 벤투리니는 2020년 6월부터 회사를 이끌어 왔으며, 앞서 구찌(Gucci)에서 상품기획·머천다이징 담당 부사장(EVP)을 지냈다.
발렌티노는 지난해 매출과 이익이 모두 감소한 뒤 조직 재정비를 추진해 왔다. 회사는 6월에도 벤투리니가 “병가 중”이라고 밝혔지만, 시장에서는 이미 퇴진설이 제기돼 왔다. 이번 발표로 그의 거취가 공식화됐으며, 새 수장 선임 작업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지분 구조와 이해관계
발렌티노는 1960년 로마에서 발렌티노 가라바니(Valentino Garavani)와 잔카를로 지아메티(Giancarlo Giammetti)가 설립한 명품 하우스다. 현재 카타르 국부펀드 메이홀라(Mayhoola)와 프랑스 럭셔리 대기업 케어링(Kering)이 공동 소유하고 있다. 케어링은 2023년 17억 유로(약 2조 4,000억 원)를 투입해 지분 30%를 인수했으며, 2028년까지 잔여 지분 70% 전량을 매입하기로 약정했다.
“벤투리니의 퇴진에 대해 메이홀라와 케어링은 즉각적인 논평을 거부했다” – 로이터 통신
로이터에 따르면 두 주요 주주는 벤투리니 사임과 관련된 문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지난달 메이홀라는 ‘발렌티노 매각 검토설’을 부인했으며, 케어링 역시 침묵을 유지해 왔다.
‘명품 업계 리더십 교체’의 의미
명품 산업은 CEO의 전략적 비전이 브랜드 정체성과 실적에 직결되는 특성을 지닌다. 특히 발렌티노처럼 오트쿠튀르(고급 맞춤복) 전통과 현대적 스트리트 감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하우스는 ‘브랜드 재해석’ 능력이 절실하다. 벤투리니는 구찌에서 경험한 과감한 머천다이징 전략을 도입해 제품 포트폴리오를 재정비했으나, 팬데믹 여파와 럭셔리 경기 둔화, 경쟁 심화로 실적 반등에는 한계가 있었다.
시장조사기관–예컨대 베인앤드컴퍼니(Bain & Company)–는 글로벌 퍼스널 럭셔리 시장 성장률이 2023년 4%로 둔화됐다고 지적한다. 전문가들은 ‘발렌티노 2.0’ 전략이 *디지털 네이티브 소비층* 공략과 고마진 카테고리(핸드백‧액세서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분석한다.
‘강압적 스타일’ 혹은 ‘혁신적 리더’?
벤투리니는 내부에서 강한 추진력과 데이터 중심 의사결정으로 평가받았지만, 조직 구성원에게는 ‘숙련된 디자이너와 크리에이티브 팀을 압박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브랜드가 창의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과정에서 CEO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간 마찰이 흔한 점을 고려하면, 리더십 교체가 조직 분위기 재정비에 일정 부분 긍정적일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또한 케어링이 2028년까지 완전 인수를 완료하면 발렌티노는 구찌·생로랑·보테가베네타 등 기존 케어링 하우스와 시너지 효과를 모색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새 CEO가 케어링 본사의 장기 전략과 발렌티노의 유산을 조율하는 ‘브랜드 통합 관리자’ 역할을 해야 할 전망이다.
용어 설명
메이홀라(Mayhoola)는 카타르 왕실 계열 투자펀드로, 발렌티노 외에도 Balmain, Pal Zileri 등 유럽 패션 브랜드에 대한 활발한 지분 투자를 진행해 왔다.
케어링(Kering)은 프랑수아 앙리 피노(François-Henri Pinault) 회장이 이끄는 프랑스 명품 지주사로, 구찌·입생로랑·보테가베네타·알렉산더맥퀸 등을 보유한다.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와 더불어 글로벌 럭셔리 시장 양강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오트쿠튀르(Haute Couture)는 프랑스어로 ‘최고급 맞춤복’을 의미한다. 파리 오트쿠튀르 협회 정식 인증을 받은 하우스만이 ‘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일 수 있으며, 발렌티노는 이탈리아 브랜드 가운데 몇 안 되는 쿠튀르 전통 보유 하우스다.
전망과 과제
업계 관계자들은 “발렌티노의 새 CEO가 언제, 누구로 선임될지가 가장 큰 관심사”라고 입을 모은다. 메이홀라와 케어링은 유럽 명품 생태계에서 서로 다른 투자 철학을 지니고 있어, 후계 구도 결정에 시간이 걸릴 가능성도 거론된다. 시장에서는 내부 승진, 외부 영입, 혹은 케어링 그룹 차원의 임시경영 체제 등 여러 시나리오가 오르내린다.
필자의 시각으로는, 케어링의 단계적 인수 완료 시점(2028년)과 글로벌 소비 회복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서는 2026년 전까지 브랜드 리포지셔닝을 마무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디지털 채널 투자 확대·아시아 지역 오프라인 리테일 재설계·핸드백 등 수익성 높은 카테고리 집중이 불가피하다.
다만 발렌티노 특유의 ‘로마적 장엄함’과 ‘이탈리아 장인정신’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상업적 확장을 이뤄야 한다는 점도 과제다. 지나친 대중화 전략은 브랜드 희소성 저하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벤투리니 이후 발렌티노가 선택할 방향은 곧 케어링 그룹 전체의 포트폴리오 다각화와도 직결된다. LVMH가 루이비통·디오르에 집중하면서 규모의 경제를 극대화하는 동안, 케어링은 ‘강력한 중견 브랜드’ 다수를 통해 위험 분산 전략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발렌티노가 안정적인 회복 곡선을 그린다면, 케어링의 장기 비전에도 긍정적 효과가 예상된다.
※ 본 기사는 로이터 통신 원문을 번역·요약하고 국내 독자를 위해 추가 해설·전망을 덧붙인 것이다. 모든 수치·인용은 로이터가 제공한 1차 정보를 기반으로 작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