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발 – 미국 에너지부(U.S. Department of Energy, DOE)가 인공지능(AI)·데이터센터 확대로 급증하는 전력 수요에 대응하고자 소형·고성능 시험 원자로(테스트 리액터) 개발을 가속화하기 위해 총 11개 민간 기업을 시범 프로그램(파일럿 프로그램)에 최초 선정했다고 12일(현지시간) 발표했다.
2025년 8월 12일, 로이터 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DOE는 이번 파일럿 프로그램을 통해 선정 기업 가운데 최소 3곳이 1년 이내에 원자로 임계(criticality) 달성, 즉 핵연료가 지속적으로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 상태에 도달하도록 지원할 방침이다. 이는 미국 내 차세대 원자력 기술의 상업화·표준화·시험 운전이 단기간에 이뤄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왜 중요한가
대형 원전은 평균적으로 설계·건설에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고 비용이 막대하다. 반면 소형 모듈형 원자로(SMR, Small Modular Reactor)는 공장 모듈화를 통해 부품을 표준화·대량생산할 수 있어, 메가와트(MW)당 건설비를 크게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이 개발사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특히 AI 운용 서버와 클라우드 데이터센터는 24시간 안정적 전력을 요구하기에, 재생에너지와 간헐성을 보완할 수 있는 SMR이 차세대 ‘분산형 베이스로드 전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정책 배경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25년 5월 두 건의 행정명령을 통해 원자로 인허가 절차 간소화와 원자력규제위원회(NRC) 개혁을 지시한 바 있다. 행정명령은 DOE가 시험 원자로에 한해 NRC의 별도 인허가 없이 자체 승인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에 따라 파일럿 프로그램은 ‘규제 샌드박스’ 성격을 띠며, 민간 분야의 신속한 기술 검증을 촉진하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의 ‘리액터 파일럿 프로그램’은 행동 촉구(call to action)의 신호탄”이라고 제임스 댄리(James Danly) 부에너지장관이 강조했다. 그는 “이 기업들이 모두 독립기념일(7월 4일)까지 안전하게 임계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DOE는 총력을 다해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선정 기업 명단
DOE는 Aalo Atomics, Antares Nuclear, Atomic Alchemy, Deep Fission Inc., Last Energy, Oklo, Natura Resources LLC, Radiant Energy, Terrestrial Energy, Valar Atomics 등 11개사를 최종 선정했다. 각 사는 시험 원자로 설계·제조·건설·해체까지 전 과정 비용을 자체 부담해야 하며, DOE는 인허가·기술 자문·부지(경우에 따라 실험용 부지 제공) 등의 행정 지원을 담당한다.
현실적 과제
미국에서는 수년간 SMR과 ‘고도(Advanced) 원자로’ 논의가 이어졌지만, 실제로 상업 운전 중인 소형 원자로는 중국과 러시아에만 존재한다. 미국이 직면한 난제는 크게 세 가지다. ①전력망 연계 상업용 발전소 인허가, ②일부 고도 원자로가 필요로 하는 고농도 저농축 우라늄(HALEU·High-Assay Low-Enriched Uranium)의 상업 생산, ③양산 체계를 갖춘 전용 공장 부재 등이다.
HALEU는 기존 경수로용 저농축 우라늄(LEU·농축도 5% 이하)보다 높은 5~20% 수준으로 농축된 연료다. 출력 밀도가 높아 원자로 크기를 줄일 수 있으나, 미국 내 상업용 HALEU 공급망은 아직 초기 단계다. 이에 따라 DOE는 별도의 HALEU 생산 프로그램도 병행 중이다.
산업적 의미와 전망
현재 데이터센터에서 사용하는 전력 소비량은 매년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생성형 AI 학습·추론 서버 도입 속도가 빨라지면서 2030년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수요가 2022년 대비 2배 이상 증가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재생에너지 확대만으로는 부담이 크다”며 SMR을 탈탄소·에너지 안보·산업경쟁력을 동시에 달성할 ‘핵심 수단’으로 평가한다.
다만 정치·사회적 수용성, 초기 투자금 확보, HALEU 공급망 구축이 삼중 과제로 남아 있다. 미국 정부가 추진하는 이번 파일럿 프로그램이 실제 상업 운전으로 이어질 경우, 원전에 대한 투자 심리와 규제 환경이 전 세계적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으나, 업계 관계자들은 “기술 실증 성공이 최우선 과제”라고 입을 모은다.
용어 설명
소형 모듈형 원자로(SMR)는 각종 핵심 부품을 컨테이너형 모듈로 제작해 현장 조립·설치 시간을 단축하는 차세대 원전이다. 출력은 대형원전(1,000MW 이상)의 10~30% 수준이나, 복수 모듈을 병렬 설치해 단계적으로 용량을 증설할 수 있다. 시험 원자로(Test Reactor)는 상업 발전이 아닌 신규 연료·재료·제어 시스템 검증을 위한 실험용 시설로, 운전기간 종료 후 즉시 해체·폐기된다.
기자 관전평
DOE의 이번 조치는 단순 연구 차원을 넘어, 현 정부가 ‘속도전’을 택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최근 미국 내 대형 원전 건설비 상승과 잦은 지연 문제를 감안하면, SMR이 ‘게임 체인저’가 되기 위해서는 고질적 규제 리스크 완화와 동시에 경제성 입증이 요구된다. 이번 프로그램이 예정보다 늦어질 경우에도, 사례 축적과 시장 형성 측면에서 ‘하나의 실험실’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AI 산업계가 주도하는 전력 수급 압박은 에너지 정책 수립의 속도를 더욱 높일 가능성이 크다. 향후 DOE와 NRC 간 권한·역할 분담, HALEU 국산화 시점, 그리고 지역사회와의 소통 전략 등이 SMR의 확산 속도를 결정짓는 핵심 변수로 떠오를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