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ESS 수요 확대, 한국 배터리 업계에 EV 역풍 넘는 ‘완충지’ 될까

미국 에너지저장시스템(ESS) 시장이 급팽창하면서 전기차(EV) 성장세 둔화에 직면한 한국 배터리 제조사에 새로운 돌파구가 될 가능성이 제기됐다. 투자은행 번스타인(Bernstein)은 보고서를 통해 올해 들어 미국 ESS 설치량이 전년 대비 57% 증가한 23.7GWh에 달했다고 분석했다.

2025년 9월 20일, 인베스팅닷컴의 보도에 따르면 번스타인은 “미국 에너지저장 시장은 전력망 회복력 강화 필요성과 전기화·인공지능(AI) 확산에 힘입어 태양광·풍력 설비 증가 속도를 압도적으로 앞질러 성장 중”이라고 평가했다. 텍사스·캘리포니아·애리조나·북버지니아 주가 수요 급증을 주도하고 있으며, 그리드 리질리언스(Grid Resilience) 확보가 투자 확대의 주요 배경으로 꼽힌다.

그리드 리질리언스란? 이는 천재지변·전력수요 급등 같은 외부 충격에도 전력망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견고성을 확보하는 개념이다. 전력망이 디지털 전환·AI 데이터센터 확충으로 한층 복잡해지면서 ESS는 전력 수요 피크를 흡수하고, 재생에너지 간헐성을 완충하는 ‘배터리 허브’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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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EV 수요 전망 비교

번스타인에 따르면 2025년 미국 ESS와 EV용 배터리 수요 합계는 192GWh로 예상되며, 이는 전년 대비 20% 증가한 수치다. 같은 기간 ESS 부문은 51GWh로 50%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 반면, EV 배터리 수요는 13% 늘어나는 데 그칠 것으로 관측됐다. 이에 따라 ESS가 전체 배터리 수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7%로 역대 최고를 기록할 것이란 예측이다.

“EV 침투율 성장 속도가 둔화되는 가운데, ESS가 배터리 산업의 차세대 성장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번스타인 애널리스트 보고서 중

특히 저장용 LFP(리튬인산철) 배터리 채택이 확대되면서 한국 기업의 전략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LFP는 니켈·코발트가 필요 없어 가격 경쟁력이 높고, 화재 안정성이 뛰어나 대형 ESS에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역 갈등이 재편하는 경쟁 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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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스타인은 “현재 중국산 ESS 배터리에 적용되는 관세는 약 40%이며, 2026년부터 58%로 인상될 예정”이라며 무역 장벽이 미국 내 생산 확대를 견인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같은 정책 환경은 한국·미국 합작 공장 및 현지화 전략에 우호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평가된다.

LG에너지솔루션(LGES)은 이미 미국에서 LFP 배터리 양산을 시작했으며, 삼성SDISK온도 2026년 현지 LFP 라인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테슬라도 네바다 공장에서 LFP 셀 생산을 추진 중이다.

특히 삼성SDI는 가장 공격적인 생산 포트폴리오 전환을 단행, 2026년 말까지 전체 배터리 생산 능력의 절반 이상(20GWh)을 ESS 용도로 배정할 계획이다. LGES는 미국 내 ESS 생산 능력이 30GWh로 가장 크지만, 이는 글로벌 총 215GWh의 15% 수준에 불과하다.


‘공급 과잉’ 경고음도 울려

급속한 수요 성장에도 불구하고 공급 과잉 리스크가 부상하고 있다. 번스타인은 “미국 배터리 제조 능력은 2025년 말 338GWh에서 2026년 601GWh로 78%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는 같은 기간 20~30% 수준으로 전망되는 수요 성장률을 크게 상회한다”고 분석했다.

즉, 미국 내 대규모 ‘치킨게임’ 가능성이 있으며, 원가 경쟁력·기술 차별화·장기 공급 계약이 없는 기업은 수익성 압박을 겪을 수 있다는 경고다.

ESS 공급 과잉이 왜 문제인가? ESS 프로젝트는 대개 전력 구매계약(PPA)이나 전력시장 수익 모델에 기반해 추진된다. 공급이 과도하면 판매 가격이 하락해 투자 회수 기간이 길어지고, 이로 인해 프로젝트 파이낸싱이 어려워질 수 있다.


한국 배터리 3사, 전략적 시사점

1) LG에너지솔루션: 가장 큰 규모의 미국 ESS 생산 능력을 확보했으나 전체 포트폴리오 대비 비중은 낮다. 다만 전기차 고객사와 ESS 고객사를 동시에 확보해 생산 라인 가동률을 최적화할 여지가 크다.

2) 삼성SDI: ‘ESS 전문 기업’으로 이미지 전환을 시도하며 LFP 기반 대형 배터리 모듈·랙 제품을 집중 육성한다. 공장 투자 로드맵이 가장 공격적이어서, 수요 과잉 국면에선 리스크도 높다.

3) SK온: 2026년 이후 미국 LFP 양산을 계획해 출발은 다소 늦지만, NCM·LFP 하이브리드 전략으로 수요 다변화를 노린다. EV 역풍에 대응해 ‘ESS 포트폴리오’ 확보를 서두르고 있다.


전문가 관전 포인트

첫째, 공급 과잉에도 불구하고 주(州)별 인센티브와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세액공제가 ESS 채택을 가속할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둘째, LFP·나트륨이온 등 대체 화학계 배우(chemistry)의 경쟁 구도가 전개될 경우, 소재·공정 혁신 역량이 판도를 좌우할 것이다. 끝으로, AI 인프라 및 데이터센터가 폭증시키는 피크 전력 수요가 ESS 시장의 장기 성장을 견인할지 여부가 관건이다.

1GWh(기가와트시)는 10억 와트시를 의미하며, 전기차 배터리(약 60kWh 기준) 1만6,000여 개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자료: Bernstein, 투자은행 보고서(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