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연방법원에서 16억1000만 달러(약 2조2400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 판결을 둘러싼 아르헨티나와 투자자 간 갈등이 외교적·법적 쟁점으로 비화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51%의 YPF 지분 인도 명령을 잠정 중단(stay)해 달라는 아르헨티나 측 요청에 힘을 실었다.
2025년 7월 18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미국 법무부는 전날 늦은 밤 미 제2연방 순회항소법원(2nd U.S. Circuit Court of Appeals)에 ‘친구 법정 의견서(friend-of-the-court brief)’ 형태로 서류를 제출하며 “급박한 강제집행이 미·아르헨티나 외교 관계에 부정적 파장을 미칠 수 있으므로, 본안 심리 전까지 지분 인도를 유예할 공익이 존재한다”고 밝혔 다.
앞서 맨해튼 연방지방법원 로레타 프레스카(Loretta Preska) 판사는 6월 30일 아르헨티나 정부에 대해 국영 석유·가스 기업 YPF(뉴욕증권거래소: YPF)의 의결권 지분 51%를 투자자 측에 넘기라는 ‘turnover order’를 내린 바 있다. 이는 2023년 9월 선고된 16억1000만 달러 배상 판결을 집행하기 위한 조치다.
투자자 측인 페테르센 에네르히아 인베르소라(Petersen Energia Inversora)와 이튼 파크 캐피털 매니지먼트(Eton Park Capital Management)는 같은 날 항소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해 “아르헨티나의 항소는 승산이 낮으며, 지금까지 보여 온 ‘지연·방해 전략’ 때문에 YPF 지분 인도가 정당하다”고 맞섰다.
다만 두 투자자는 항소법원이 즉시 유예 청구를 기각하지 않는다면 사건을 프레스카 판사에게 되돌려 아르헨티나가 대체 담보(alternative collateral)를 제시하거나, 판결 뒤집기 시 “되돌릴 수 없는 결과”가 없도록 조건을 설정해 달라고 제안했다. 이들은 “우리에게는 YPF를 직접 운영할 의사가 없으며, 항소에서 아르헨티나가 승리할 (가능성은 낮지만) 경우를 대비해 지분 회수가 가능하도록 합리적 조건을 수용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현재까지 공식 논평을 내지 않았지만, 이전 서류에서 “YPF 지분 상실은 돌이킬 수 없는 경제적 손실이며 거시경제 안정성을 위협한다”고 주장해 왔다. 정부는 7월 22일까지 투자자 측 서류에 대한 답변서를 제출해야 한다.
용어 해설
• Turnover Order: 판결금을 강제집행하기 위해 채무자의 특정 자산을 채권자에게 양도하라고 명령하는 법원의 집행명령.
• Friend-of-the-Court Brief(Amicus Brief): 소송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공익 또는 전문적 견해를 제공하기 위해 제출하는 의견서.
• Alternative Collateral: 원래 집행 대상 자산 대신 제공할 수 있는 다른 담보.
배경 및 쟁점
이번 소송은 2012년 아르헨티나가 스페인 레프솔(Repsol)로부터 YPF 지분을 국유화하면서 소수주주에게 의무적 공개매수(tender offer)를 실시하지 않은 것에서 촉발됐다. 투자자들은 “소수주주 권리 침해”를 이유로 뉴욕 법원에 민사소송을 제기했고, 프레스카 판사는 2023년 9월 “야기된 손해를 160억 달러 이상으로 인정”하며 투자자 손을 들어줬다.
투자자 측 소송비를 조달한 버포드 캐피털(Burford Capital)은 판결금 중 35%와 73%를 각각 수취하는 구조로 페테르센·이튼파크와 이익배분 계약을 맺었다고 공시했다. 소송자금 조달 사업자(Litigation Funder)가 소수주주 권리 보호를 위해 적극 나서는 사례가 늘면서, 향후 신흥국 국영기업 국유화 분쟁에서도 유사한 구조가 반복될 전망이다.
전문가 시각
국제 투자중재 전문 변호사들은 “미국 정부가 외교 관계 악화를 우려해 ‘집행 유예’에 손을 들어준 것은 이례적”이라며, 국가 대 국가 차원의 정치적 고려가 민사집행 절차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라고 평가한다. 실제로 미 연방항소법원이 외교적 파장을 이유로 집행 유예를 허가할 경우, 향후 외국 국채 및 기업채권 투자자들은 ‘집행 리스크’ 프리미엄을 더 높이 책정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면 채권자 권리 측면에선 “판결 채권 회수의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투자자들이 요구하는 수익률이 높아져, 신흥국의 자본조달 비용이 구조적으로 상승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특히 아르헨티나가 대체 담보를 제시하거나 입금 보증을 설정하지 못한 채 집행 유예만 연장할 경우, 항소 패소 시 투자자들이 실제 배상을 회수할 방법이 더욱 복잡해질 수 있다. 이는 뉴욕법원 관할 하에 있는 라틴아메리카 채권·주식 투자 전반에 선례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전망
항소법원이 유예 여부를 판단하기까지 최소 수주가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투자자 측이 요구한 ‘조건부 담보’가 타협점이 될 수 있지만, 아르헨티나의 재정 여력과 정치적 계산이 복합적으로 얽혀 결론을 예단하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궁극적으로는 YPF 지분 소유권이 다시 국가 손을 떠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시각이 우세하지만, 소송 지연으로 인한 법률 비용·이자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전망이다. 따라서 국제 자본시장은 항소 판결뿐 아니라 양측 간 “담보 제공을 전제로 한 합의(settlement)” 가능성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