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가 만성적인 전력난 해결을 위해 추진해 온 투르크메니스탄산 천연가스 수입 계획이 미국의 제재 우려로 전격 중단됐다.
2025년 9월 19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이라크는 연간 약 5.025억㎥(bcm)의 가스를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이란을 거쳐 들여오려 했으나, 미국 정부의 최종 승인을 받는 데 실패했다. 해당 스왑 계약은 이란 국영가스회사(NIGC)가 중간 거래를 맡고, 이란이 전체 물량의 최대 23%를 자국 소비용으로 가져가는 구조였다.
이라크는 2003년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 석유 부국임에도 전력 인프라가 심각하게 훼손되면서 국민들이 값비싼 개인 발전기에 의존해 왔다. 고온다습한 여름에는 전력 수요가 급증해 냉방비 부담이 가중되고 사회적 불만도 높아진다.
“이건 나만의 고통이 아니라 모든 이라크인의 고통이다.”1
— 바그다드 카스라 지역 정육점 주인 후세인 사드(43)
이라크 정부는 미국의 대(對)이란 제재를 우회하기 위해 제3의 국제기관이 자금 흐름과 AML 규정을 감독하도록 하는 방안까지 제시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에 이익을 줄 수 있는 어떠한 거래도 승인할 수 없다
며 난색을 표했다.
아델 카림 이라크 총리실 전력 고문은 “계약을 강행할 경우 이라크 금융기관이 2차 제재에 노출될 수 있어 현재로선 프로젝트를 보류했다”고 설명했다.
미 재무부는 공식 논평을 거부했지만, 익명을 요구한 미 행정부 관계자는 “이라크의 에너지 수요 해결을 돕기 위한 다른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밝혔다. 이란 정부·석유부·NIGC 및 투르크메니스탄 외무부는 로이터의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이라크, 이란 가스 의존 심화
이라크는 지난 10년간 전력 생산량의 약 3분의 1을 이란산 가스에 의존해 왔다. 2024년 기준 이란에서 수입한 가스는 9.5bcm에 달한다. 한 전력청 관리는 “이란 가스가 끊기면 발전 설비 가동이 즉각 차질을 빚는다”고 말했다.
이라크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2위 산유국이지만, 가스 포집·처리 시설 부족으로 원유와 함께 생산되는 천연가스를 대량 플레어링(flare)해 왔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23년 자체 활용 가능한 가스 생산량은 110억㎥에 불과했다.
계절별 수요도 극심하다. 아델 카림 고문은 “여름철 수요는 하루 4500만㎥, 겨울·봄철엔 1000만~2000만㎥로 변동한다”고 밝혔다.
미국, 제재 유예 종료로 압박 수위↑
2025년 3월 미국 정부는 2018년부터 이어온 대이란 전력·가스 결제 유예를 중단했다. 이로 인해 이라크는 3000메가와트(MW) 이상의 발전 용량을 잃었고, 이는 250만 가구에 영향을 미치는 규모라고 전력부 관계자들은 전했다.
이라크 전력부는 5월 27일 국영 무역은행(TBI)에 보낸 서한에서 “스왑 계약 무산 시 여름철 블랙아웃이 불가피하다”고 경고했으며, 결국 8월 전국적인 정전 사태가 발생했다.
대안 모색: LNG·해외 메이저와의 협력
투르크멘 루트가 막히자 이라크는 LNG(액화천연가스) 도입을 추진 중이다. 국영 남부가스회사(SGC)의 함자 압둘 바키 사장은 “카타르·오만산 LNG를 처리할 부유식 저장·재기화 설비(FLNG)를 임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토탈에너지스, BP, 셰브론 등 글로벌 메이저와 합작으로 가스·전력 프로젝트를 가속화하고 있다. 토탈에너지스는 270억 달러 규모의 루토위(Ratawi) 통합 프로젝트 2단계에 착수했고, BP는 키르쿠크 유전 재개발을 승인받아 30억 배럴 상당의 매장량을 목표로 하고 있다.
용어·수치 해설
bcm은 billion cubic metres의 약어로, 10억㎥에 해당한다. 가스 산업에서 연간 거래·생산 규모를 나타내는 기본 단위다.
플레어링은 유전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한 가스를 태워 버리는 관행으로, 메탄 배출과 자원 낭비 문제를 유발한다.
스왑 계약(가스 스왑)은 세 나라 이상이 파이프라인·대금을 교환해 서로 효율적으로 자원을 조달하는 방식이다.
기자 분석
이라크는 워싱턴과 테헤란이라는 두 우방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계속해 왔다. 이번 무산은 단순 전력 공급 차질을 넘어, 자국 금융·외교 노선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압력을 가중시킨다. 장기적으로는 가스 자주개발과 다변화가 해법이겠지만, 단기간 내 성과를 내기엔 투자·기술·정치 리스크가 거대하다.
특히 기후변화·탈탄소 흐름 속에서 대규모 화석연료 기반 인프라 확충이 국제사회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지도 변수다. 전문가들은 “이라크가 에너지 안보와 지정학적 리스크를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고 진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