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기업들이 경영진 보호를 위해 사상 최대 규모의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최근 8개월 사이 뉴욕 맨해튼에서 두 차례 발생한 고위 임원 피살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면서, 기업들은 경비 인력을 늘리고 정보 보안까지 전방위적으로 강화하는 모습이다.
2025년 8월 5일, 인베스팅닷컴 보도에 따르면 보안·시설관리 업체 앨라이드 유니버설(Allied Universal)의글렌 쿠세라 고급 보호 서비스 부문 대표는 “지난주 발생한 총격 사건 이후, 뉴욕 시내 주요 빌딩 앞에 배치된 사복 경호팀의 규모가 두 배로 급증했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블랙스톤(Blackstone) 임원 웨슬리 르패트너가 숨진 7월 28일 맨해튼 총격을 지칭한다. 당시 범인은 미식축구리그(NFL) 본사를 노린 무차별 총격을 벌였고, 르패트너 외에도 뉴욕 경찰관 1명, 건물 경비원 1명, 부동산 기업 루딘(Rudin) 직원 1명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살해당한 지인을 아는 것은 처음이다.” — 리치 프리드먼 골드만삭스 자산운용 회장
시티그룹(Citigroup) 대변인 에드 스카일러는 사건 다음 날 직원들에게 보낸 메모에서 “이번 사건은 충격적이며 우리 모두를 불안하게 했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해부터 맨해튼 본사 경비를 지속적으로 강화해 왔다고 강조했다.
사이버보안 기업 블랙클로크(BlackCloak)의 CEO 크리스 피어슨은 “2020년 이후 임원 대상 위협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6월 미네소타주에서 주 의원 부부가 살해된 사건에서, 피의자가 온라인 인명 검색 서비스를 활용해 주소를 수집했다는 경찰 발표를 인용하며 오프라인 범죄와 온라인 정보 노출이 결합된 새로운 위험을 지적했다.
소셜미디어가 불만을 증폭시키면서 경영진에 대한 위험이 더욱 커졌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보안 자문사 처토프 그룹의 벤 조엘슨 책임자는 “딥페이크·AI 기반 피싱 시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리서치사 에퀼라(Equilar) 보고서에서 ‘실제와 구별이 어려운 전자메일 공격’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밝혔다.
2023년 12월 뉴욕에서 유나이티드헬스케어(UnitedHealthcare) CEO 브라이언 톰프슨이 총격으로 사망했을 때만 해도 업계는 이를 ‘블랙스완’(극히 드문 사건)으로 봤다. 그러나 이후에도 미네소타 살인 사건, 5월 워싱턴 D.C.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 직원 2명 피살 등 표적 공격이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크롤(Kroll)의 글로벌 보안 책임 매슈 덤퍼트는 “맨해튼 참사 직후 기존 고객과 신규 고객이 대거 연락해 왔다”고 밝혔다. 그는 “긴급 대응 프로젝트를 연말에 시작하려던 고객들이 ‘즉시 착수하라’고 요청했다”고 전했다.
경영진 보호비 지출, 얼마나 늘었나?
리서치사 에퀼라가 미국 상위 500대 상장기업의 공시자료를 분석한 결과, 2024년 CEO·CFO 등 주요 임원 1인당 중간 보안비는 106,530달러로 전년 대비 16% 증가하며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보호 항목에는 주거용 감시·경보 시스템, 개인 경호, 사이버보안이 포함된다. 보호 서비스를 받는 임원 비율은 2020년 23.3%에서 2024년 33.8%로 급등했다. 특히 CEO만 보면 2020년 21.9%에서 지난해 32.4%로 늘었고, CEO 1인당 보안 혜택 가치는 77,976달러로 집계됐다.
기술 업종은 2020~2024년 동안 임원 보호 프로그램 도입률이 73.5%나 증가하며 가장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반면 커뮤니케이션 업종은 임원 1인당 연간 120만 달러를 지출해 금액 기준 최대였다.
“지정학적 불안정, 사이버 위협 확대, 최고경영자의 공공 노출도 상승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임원 보호 수요는 계속 증가할 것이다.” — 에퀼라 보고서
월마트·GM·아메리칸익스프레스 등도 예산 확대
유통 공룡 월마트, 자동차 업체 제너럴모터스(GM), 카드사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 등 블루칩 기업들은 2023년 브라이언 톰프슨 CEO 사건 이후 공시를 통해 보안 예산 증액을 공식화했다.
에퀼라는 이러한 흐름이 “전혀 놀랍지 않다”고 평했다. 지정학적 리스크, 사이버 공격, 리더십에 대한 대중의 감시 강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위협이 상시화됐다는 분석이다.
용어·배경 설명
사복 경호팀(plain-clothed security)은 유니폼을 착용하지 않고 일반인과 동일한 복장으로 경비 활동을 수행해 잠재 위협에 대한 은밀한 관찰이 가능하다.
블랙스완(black swan) 이벤트는 발생 가능성이 극히 낮지만, 일단 발생하면 영향력이 막대한 사건을 뜻한다. 금융시장이나 기업 리스크 관리에서 자주 사용되는 개념이다.
피싱(phishing)은 이메일·메신저 등을 활용해 사용자를 속여 로그인 정보나 금융정보를 탈취하는 사이버 공격 기법이다. 최근에는 AI로 생성된 정교한 가짜 메시지가 등장해 경영진 표적 공격에도 활용된다.
전문가 시각
국내외 보안 전문가들은 “하이브리드 보안 전략”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물리적 경호와 사이버보안, 그리고 위기 커뮤니케이션을 통합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임원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OSINT(공개 정보 분석) 대응 훈련을 실시하고, 가족 구성원까지 보호 범위를 확대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한국 기업 역시 해외 사업 확장과 글로벌 노출도 증가로 유사한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 따라서 조기 경보 시스템과 다층 방어 체계 구축, 사이버 인슈어런스 도입 등을 통해 선제적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