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만두발 정치 격변이 새 국면을 맞았다. 네팔 정치권과 군(軍) 고위 인사들 사이에서 ‘반(反)부패 시위’가 촉발한 정권 공백을 메우기 위해 수실라 카르키 전 대법원장을 과도(임시) 총리로 임명하는 방안이 사실상 확정됐다는 관측이 나왔다.
2025년 9월 12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카르키 전 대법원장의 임명은 이날 오전 9시(현지시간·그리니치표준시 03시 15분) 라마찬드라 파우델 대통령 관저에서 열릴 예정인 고위 협의회 직후 공식 발표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지난주 격렬한 시위 끝에 K.P. 샤르마 올리 총리가 전격 사임한 지 약 일주일 만이다.
정치권 관계자이자 헌법 전문가로 파우델 대통령과 아소크 라즈 시그델 육군참모총장에게 자문한 인사는 익명을 전제로 “Gen Z 시위대가 카르키를 원한다”며 “임명은 오늘 중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Gen Z’는 시위를 주도한 20대‧30대 젊은 층을 가리키는 별칭이다.
“그들은 부패 청산을 상징할 수 있는 비(非)정치인 인물을 요구했고, 사법부 수장 출신인 카르키가 가장 적합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 협의회 관계자
■ 정치·사회적 배경
네팔은 2008년 군주제 폐지 이후 17년 동안 9차례나 정부 수반이 교체될 정도로 만성적 정치 불안을 겪어 왔다. 일자리 부족으로 약 400만 명이 해외에 취업해 송금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국내총생산(GDP)의 23%가량을 해외 송금에 의존한다.
지난주 발생한 반부패 시위는 정부가 소셜미디어 차단 정책을 전격 시행했다 철회하면서 불길이 번졌다. 34명 사망·1300명 부상이라는 참혹한 인명 피해를 낳은 뒤, 올리 총리가 사임하면서 진정 국면으로 돌아섰다.
카트만두 도심 한복판은 12일 오전부터 점차 활기를 되찾고 있다. 일부 상점이 문을 열었고, 군 병력도 소총 대신 진압봉을 휴대한 상태로 축소 배치됐다. 다만 곳곳에 설치된 바리케이드와 군 검문소는 여전히 긴장감을 보여주고 있다.
■ 수실라 카르키는 누구인가?
1952년생인 카르키는 네팔 최초의 여성 대법원장(2016~2017)으로, 재임 기간 ‘사정(司正) 칼날’을 정치권 전반에 겨눠 ‘강단 있는 판사’라는 명성을 얻게 됐다. 특히 군 고위층 뇌물 사건과 전직 장관 비리 사건에 대한 무관용 판결로 시민사회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정치 경력이 전무하다는 점은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특정 정파에 예속되지 않은 개혁 드라이브를 기대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파적 지지 기반이 약해 정책 드라이브 추진 동력이 부족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임시 총리’(Interim Prime Minister)는 통상 총선이나 국민투표 전까지 한시적으로 내각을 이끄는 관리형 수반을 의미한다. 임기는 평균 3~6개월로, 선거 관리·헌법 개정·비상대책 수립 등 제한적 권한만 행사한다.
■ 시위대 요구와 향후 과제
Gen Z 시위대는 첫째, 독립적 수사기구 설치, 둘째, 부패 연루 고위인사 일괄 사퇴, 셋째, 청년 고용 확대 정책을 핵심 요구사항으로 내세웠다. 이들은 SNS 플랫폼을 통해 실시간으로 시위를 조직·확산했으며, 당초 정부의 소셜미디어 차단령이 불씨가 됐다는 점에서 디지털 권리 보장 역시 주요 의제로 부상했다.
카르키 내각이 출범하면 첫 과제는 비상사태 해제와 중간선거 로드맵 수립이 될 전망이다. 헌법상 30일 이내에 선거 일정을 공표해야 하고, 90일 이내에 새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인도·중국 관계도 시험대에 오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양대 강국은 네팔에 대한 인프라 개발·원조·관광 투자 경쟁을 벌이고 있어, 중립적 외교를 유지하기 위한 균형 감각이 필수적이라는 지적이다.
■ 전문가 진단
카트만두 정책연구소(CPS)의 닷타람 아차르야 선임연구원은 “사법부 인사가 총리직을 맡는 사례는 흔치 않지만, 정치권 붕괴 상황에서는 비(非)정치권 인물이 중재자로서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단명 내각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구조적 개혁까지 완수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경제 측면에서 골드만삭스 싱가포르 지점의 네팔 담당 이머징 마켓 분석팀은 “시위 여파로 이미 3분기 관광 수입이 전년 동기 대비 18% 급감했다”고 밝혔다. 또 “정치 리스크 프리미엄이 단기간 내 해소되지 않을 경우, 네팔 루피화가 추가로 약세 압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 용어 해설
Anti-graft(안티 그래프트) : 공공 부문·정치권에서 발생하는 뇌물·부패 행위를 단속·근절하려는 운동 또는 정책을 의미한다.
Gen Z(제트세대) : 1997년 이후 출생해 디지털 네이티브로 성장한 세대를 가리키며, 네팔 시위에서는 온라인 조직·시위 문화를 주도한 핵심층으로 등장했다.
Interim PM(임시 총리) : 총선·국민투표·위기 상황 등으로 정규 내각이 해산된 기간 동안 한시적으로 국가 운영을 담당하는 수장을 뜻한다. 정책 권한은 제한적이나, 선거 관리 및 비상 법령 정비 권한은 비교적 광범위하다.
■ 향후 시나리오 및 전망
첫째, 정치 안정을 회복할 경우, 2026 회계연도 국채 발행 규모가 당초 계획된 11억 달러에서 8억 달러 수준으로 축소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 시위대 요구가 부분적으로만 수용될 경우, ‘2차 촛불시위’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 셋째, 카르키 내각이 대외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투자환경 개선 패키지를 발표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요컨대, 카르키 전 대법원장 내각의 성공 여부는 부패 청산 의지와 청년층 일자리 정책, 그리고 인도·중국을 포함한 대외 관계 관리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대통령실 및 육군본부는 로이터 질의에 공식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파우델 대통령 측근은 “협상이 극도로 민감한 단계라 비공개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고만 전했다.
현재로서는 임시 내각 인선·정책 향배가 시위대 만족도를 좌우할 핵심 변수로 꼽힌다. 정권 공백이 장기화될 경우, 관광·원조·송금 등 대외 의존도가 높은 네팔 경제에 상당한 충격이 불가피하다는 경고도 잇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