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 업계의 핵심 기업인 Nvidia와 Advanced Micro Devices(AMD)가 중국 시장에서 판매하는 특정 고성능 그래픽·AI 칩 매출의 15%를 미국 정부에 납부하기로 합의했다. 이 전례 없는 조치는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한층 고조되는 가운데 이뤄졌으며, 기업·투자자·정책 입안자들에게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2025년 8월 10일, CNBC 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두 기업은 화이트하우스와 직접 협상을 통해 해당 매출 분담 방식을 도입했고, 그 대가로 Nvidia의 H20 및 AMD의 MI308 등 최신형 AI·데이터센터용 칩의 중국 수출을 위한 수출 면허(export license)를 발급받게 됐다.
이번 합의는 도널드 트럼프 전(前) 대통령 행정부 시절 도입된 고율 관세 정책이 여전히 글로벌 공급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트럼프 행정부는 자국 내 제조를 장려하기 위해 2018년부터 중국산 첨단 부품에 고율 관세를 부과해 왔으며, 이는 반도체 업계에 무역 불확실성을 심화시켜 왔다.
Financial Times(FT)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중국 내 AI·클라우드 수요를 노리는 미국 반도체사들의 판매를 전면 차단하는 대신, ‘매출 공유’라는 이례적 방식을 제시해 일종의 통제된 시장 진입을 허용했다. 이에 따라 두 기업이 납부한 매출의 15%가 미 재무부로 흘러 들어가며, 미국 정부는 기술 유출을 관리하면서도 재정 수입을 확보하게 된다.
FT는 “Nvidia CEO 젠슨 황(Jensen Huang)이 지난주 백악관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면담했다”면서 “이번 면담이 합의 성사에 중요한 전기가 됐다”고 전했다.
엔비디아 측은 성명을 통해 “우리는 전 세계 시장에서의 활동을 위해 미국 정부가 정한 규칙을 준수한다”고 밝혔다. AMD 역시 공식 논평은 내놓지 않았지만, 내부적으로는 중국 매출 유지가 데이터센터 및 AI 트레이닝 칩 부문의 중장기 성장 돌파구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주 연설에서 “미국 내에서 생산하지 않는 반도체·칩에는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 발언은 2024년 대선을 앞두고 ‘제조업 리쇼어링(reshoring)’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운 가운데 나온 것으로, 업계 전반에 ‘제조 거점 재편’ 압박을 가중시키고 있다.
용어 해설
- 수출 면허(export license): 미국 정부가 국가안보·대외정책적 이유로 첨단 기술·제품에 대해 부여하는 통제 장치다. 승인 없이는 해외 판매가 불가능하다.
- 관세(tariff): 수입품에 부과되는 세금으로, 자국 산업 보호와 무역 협상 지렛대 역할을 겸한다.
- AI 가속기 칩: 인공지능 학습·추론 연산에 최적화된 고성능 프로세서로, 대규모 데이터센터와 자율주행, 클라우드 서비스의 ‘두뇌’ 역할을 한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번 합의를 “정부와 기업 간 이해관계를 절묘하게 절충한 사례”로 평가한다. 미국 정부는 안보 우려를 일정 부분 해소하는 동시에 실질적 세수 확보에 성공했고, 두 기업은 최대 수요처인 중국 시장을 잃지 않으면서도 규제 리스크를 관리하게 됐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매출 15% 납부라는 비용 부담이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와, 또 다른 기술 규제가 뒤따를 가능성에 대한 경계도 공존한다.
특히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에서, 예외적 라이선스 발급은 경쟁사 및 동맹국 기업들로부터 “역차별”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 EU와 일본, 그리고 대만 TSMC 등은 ‘같은 룰’ 적용을 요구하며 외교적·경제적 협상력을 높일 가능성이 크다.
향후 협상 과정에서 칩 설계 IP(지식재산권)와 제조 공정 기술에 대한 구체적 데이터 공유 범위, 그리고 납부 구조의 투명성 등이 주요 쟁점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또한 이러한 매출 분담 모델이 기존 수출통제체제(Export Control Regime)의 표준으로 자리 잡을지 여부에도 업계 이목이 집중된다.
결과적으로 Nvidia와 AMD의 중국 수출은 당분간 재개되지만, 이번 사례가 미·중 기술전쟁의 새로운 ‘세금 모델’로 자리 잡을 경우, 다른 미국 기술기업들도 비슷한 상황에 놓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투자자와 시장 참여자들은 앞으로 미국 대선, 무역 정책 변화, 중국의 대응 조치 등을 면밀히 주시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