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ECB)이 은행 규제 체계 전면 재정비에 나선다
유럽중앙은행(ECB) 부총재 루이스 데 긴도스가 10여 개에 달하는 현행 자본완충(capital buffer) 규정을 줄이고, 소규모 은행에 대한 감독 방식을 보다 ‘비례적(proportionate)’으로 개편하겠다는 입장을 공식화했다.
2025년 10월 1일, 인베스팅닷컴의 보도에 따르면 데 긴도스 부총재는 워싱턴 D.C. 소재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Politico)가 주최한 행사에서 “유럽 은행들은 현재 10가지가 넘는 자본완충 의무를 부담하고 있다”며 “규칙을 간소화하고 규모가 작은 금융기관에 맞게 감독 강도를 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권고안을 제시할 것”이라며, 곧 발표될 세부 방안이 자본 규제 프레임워크의 복잡성을 대폭 완화하는 데 초점을 둘 것임을 시사했다. 데 긴도스가 언급한 ‘권고안(recommendation)’은 법적 강제력은 없지만, 역내 은행감독의 최종 규칙을 작성하는 유럽은행감독청(EBA)·유럽이사회(ECOFIN)·유럽의회(EP)에 강력한 정책 신호를 보낼 수 있다.
자본완충(Capital Buffer)이란 무엇인가?
자본완충은 위기 발생 시 은행이 손실을 흡수해 금융 시스템을 보호하도록 설계된 규제 자본의 여분을 말한다. 바젤Ⅲ 체계 아래서도 운용되는 이 제도는 △보통주자본보전버퍼(CCoB) △대손충당버퍼 △시스템적중요은행(SIB) 버퍼 등으로 세분화되며, 각국·각 규제기관이 별도로 요구하는 추가 버퍼까지 더해지면 은행은 이중·삼중 규제에 직면하게 된다.
데 긴도스는 이날 발표에서 “
현 체계는 실무진조차 이해하기 어렵다. 규제의 목적이 모호해지고, 은행들은 자율 경영 여력을 잃는다
”고 지적했다.
소규모 은행에 대한 ‘비례적 감독’ 확대
부총재는 또 다른 권고안으로 ‘프로포셔널리티(proportionality)’ 원칙을 강조했다. 그는 “규모가 작은 은행을 대형 글로벌 은행과 같은 잣대로 감독하는 것은 과도한 행정·준법 비용을 초래한다”고 밝히며, 예컨대 총자산 300억 유로 미만 은행에 대해 보고 의무 완화나 현장검사 주기 조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했다.
ECB 내부 관계자들은 이번 권고가 현장·비현장 감독(SREP) 평가 방식, 스트레스테스트 빈도, 리스크 가중치 산정 모델 승인 절차 등에 구체적으로 반영될 것으로 보고 있다.
경제·시장에 미칠 파장
전문가들은 자본완충 요건 축소가 은행의 대출 여력 확대로 이어져 역내 경기 부양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분석한다. 절차 간소화로 절감된 관리비용이 중소기업·가계 대출로 전환되면 실물경제에 긍정적이라는 설명이다. 다만, 완충재를 줄이는 만큼 위기 방어 능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프랑크푸르트 소재 금융연구소 관계자는 본지 통화에서 “ECB가 권고 수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각국 감독당국의 대응 강도도 엇갈릴 것”이라며 “정책 일관성과 금융안정 사이 균형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시장에서는 이번 권고가 2026년 상반기 전후로 EU 공동입법 절차에 착수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최종 규정화까지 최소 12~18개월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한다.
배경과 향후 일정
유럽연합(EU)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도입된 바젤Ⅲ 기준을 단계적으로 완성하고 있으나,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 복합 위기 속에서 자본규제에 대한 정밀조정(dial-back) 압력이 높아졌다. 이번 ECB 발표는 그러한 흐름의 연장선으로 읽힌다.
ECB는 늦어도 2025년 12월 말까지 권고안을 확정해 유럽은행감독청(EBA)·유럽의회에 제출할 예정이며, 이후 공청회와 영향평가(Impact Assessment)를 거쳐 최종 규정이 확정된다.
기자 해설 및 전망
기자가 보기에는 이번 권고는 ‘단순화(Simplification)’와 ‘정합성(Consistency)’을 추구하는 글로벌 규제 트렌드와 궤를 같이한다. IMF, BIS(국제결제은행) 역시 최근 보고서에서 자본규제 겹치기 문제를 지적해 왔는데, ECB의 행동은 글로벌 논의 선도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궁극적으로는 “위기 시 정부·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역할을 어느 정도로 보장할 것인가”라는 정치·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자본완충을 낮추면 민간은행의 자구 능력이 줄어드는 만큼, 공적 안전망 설계 논의도 병행돼야 한다.
향후 6개월은 은밀한 로비와 이해관계 조정이 집중되는 시간이다. 각국 재무부·감독청, 은행연합은 물론, 소비자단체·중소기업 협회까지 다양한 이해당사자가 목소리를 낼 것으로 보인다.
ECB의 최종 권고가 확정되면, EU 차원에서 단일규정(Single Rulebook) 업데이트 작업이 본격화된다. 이는 2027년까지 단계적으로 시행될 가능성이 크며, 유럽 금융시장의 리스크 지형과 은행 비즈니스 모델에 지속적인 변화를 촉발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