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발 — 미국 대형 로펌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보여주는 새 법정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로이터통신(Reuters)이 단독 입수‧보도한 내부 문서와 재판 기록에 따르면, 올해 3~4월 트럼프 대통령과 ‘사업 제재 철회’를 전제로 합의를 맺은 9개 로펌 가운데 최소 4곳이 이후 트럼프 행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맡아 진행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2025년 9월 16일,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Latham & Watkins(레이덤 앤드 왓킨스), Willkie Farr & Gallagher(윌키 파 & 갤러거), Skadden, Arps, Slate, Meagher & Flom(스캐든), Milbank(밀뱅크) 등 4개 로펌은 합의 체결 이후에도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한 트랜스젠더 권리, 이민, 관세, 풍력 발전 관련 정책에 반대하는 소송을 제기하거나 기존 의뢰인을 대리해 소송을 수행하고 있다.
“대형 로펌 입장에서 ‘정부 상대 소송’은 매출과 명성을 동시에 결정짓는 핵심 시장이다”라고 기업윤리 자문 변호사인 마이클 매케이브(Michael McCabe)가 말했다.
*매케이브는 다수 로펌에 윤리 자문을 제공하는 비즈니스 변호사다.
합의 이후에도 이어지는 네 갈래 소송
1) 풍력 발전 프로젝트 중단 소송 — 덴마크 에너지 기업 오스테드(Ørsted)가 주도하는 합작법인 ‘레볼루션 윈드(Revolution Wind)’는 Latham & Watkins를 선임해 이달 초 트럼프 행정부를 상대로 연방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가 로드아일랜드 해상 풍력 단지 건설을 전격 중단하자, 레볼루션 윈드는 “이미 50억 달러를 투입했고, 중단이 지속되면 10억 달러 추가 손실이 예상된다”고 주장하며 헌법적 ‘적법 절차’(Due Process) 침해 및 연방 규정 위반을 근거로 들었다.
2) 트랜스젠더 학생 화장실 사용권 보장 소송 — 버지니아주 알링턴 카운티와 페어팩스 카운티 학군은 Willkie Farr & Gallagher를 통해, 트럼프 행정부가 “성별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 연방 교육법(Title IX)을 위반했다”며 학군의 연방 지원금 삭감을 시도한 데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1심에서 기각됐으나 팀 히피(Timothy Heaphy) 파트너가 이끄는 법률팀이 항소를 진행 중이다.
3) 긴급 권한 활용 대규모 관세 부과 소송 — Milbank는 중소기업 연합을 대리해 6월부터 트럼프 대통령의 ‘국가비상사태 권한’을 활용한 광범위한 관세 부과 조치에 대해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닐 카티얼(Neal Katyal) 전 연방대행(Solicitor General)이 변론을 맡았으며, 자유정의센터(Liberty Justice Center)가 공동 대리인으로 참여했다. 하급심은 원고 측 손을 들어줬고, 연방대법원이 올 11월 정부 측 항소를 심리할 예정이다.
4) 이민 비자 거부 소송 — Skadden은 비영리단체 ‘전국이민자정의센터(NIJC)’와 함께, 범죄 피해자에게 발급되는 ‘U 비자’를 거부당한 멕시코 여성의 소송을 5월 제기했다. 이 소송은 저소득 이민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NIJC와 스캐든이 트럼프 2기 이전부터 협력해 온 공익 소송의 연장선이다.
트럼프의 ‘무기화’ 논란과 9개 로펌 합의
트럼프 대통령은 1월 재집권 직후, 자신과 정치적 대립 관계에 있거나 다양성‧포용성(Diversity & Inclusion, D&I) 정책을 추진한 5개 로펌을 향해 “연방 정부를 상대로 법 체계를 무기화(weaponizing)했다”고 비판하며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해당 명령은 로펌의 보안 등급 박탈, 연방 관공서 출입 제한, 공공계약 수주 제한을 목표로 했다.
당시 5개 대상 로펌 가운데 Paul, Weiss만이 대통령과 직접 합의를 맺자, 나머지 4개 로펌은 즉각 소송으로 맞섰다. 동시에 추가로 4개 로펌이 트럼프 측과 합의에 돌입해, 결국 총 9개 로펌이 ‘행정명령 철회 대가’로 무상 법률 서비스(Pro Bono) 9억 달러어치를 행정부 선호 사업에 제공하기로 했다.※Pro Bono : 로펌이 사회공헌 차원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법률 서비스.
이 과정에서 미 의회의 리처드 블루멘설(Richard Blumenthal) 상원의원과 제이미 래스킨(Jamie Raskin) 하원의원은 4월 18일 서한을 보내 “로펌들이 대통령에게 표현의 자유를 포기하고 고객 선택권을 넘겼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로펌 측은 내부 이메일에서 “사건 수임 결정은 전적으로 로펌 자율”이라고 반박했다.
합의 후에도 이어진 헌법 소송…판결과 쟁점
앞서 합의에 불응하고 소송을 제기한 4개 로펌은 1심에서 일제히 승소했다. 법원은 트럼프 행정명령이 헌법 수정 제1조(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현재 트럼프 행정부가 항소를 제기해 상급심이 진행 중이다.
로이터가 7월 추가 취재한 결과, 다수 대형 로펌이 정부 보복 우려로 공익 소송과 다양성 프로그램 축소에 나선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은 비용과 정치적 리스크가 크지만, 로펌의 위상·영업력에 직결되기 때문에 전면 철수는 어려운 딜레마다.
전문가 분석: ‘수임 포기’는 현실적 한계
로펌 경영 컨설턴트들은 “연방 정부 상대 소송은 매년 수십억 달러 규모의 ‘빅 마켓’”이라며 “고객사가 기업·지자체·비영리 등 다양한 만큼, 합의 하나로 그 판을 접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오스테드처럼 장기간 협력 관계를 맺은 글로벌 기업이나, 트랜스젠더 학생·이민자처럼 사회적 파급력이 큰 공익 사건은 로펌이 ‘명분’과 ‘실리’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기회다.
또한 밀뱅크의 닐 카티얼처럼 대법원 전문 변호사를 보유한 로펌은, 정부 정책을 다퉈야 하는 복잡한 헌법 소송에서 경쟁력을 발휘해 로펌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다. 반면 트럼프 행정부도 합의 로펌에 대한 직접 제재를 재개하면, 대법원 판결에 악영향을 줄 수 있어 ‘정치적 역풍’을 우려한다는 관측도 나온다.
알아두면 좋은 용어 정리
• Due Process(적법 절차) : 연방 정부가 국민의 권리·재산을 박탈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헌법적 절차.
• Title IX : 교육 현장에서 성 차별을 금지하는 1972년 제정 연방법.
• U 비자 : 미국 법무부가 범죄 피해자 보호·수사 협조를 위해 발급하는 임시 체류 비자.
• Pro Bono : 로펌이 사회적 약자·공익을 위해 무상으로 제공하는 법률 서비스.
전망과 과제
향후 트럼프 행정부가 제기한 항소심, 특히 연방대법원 심리 결과가 로펌-행정부 간 관계 설정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법원이 ‘헌법적 표현의 자유’를 재확인할 경우, 대형 로펌의 공익·인권 소송 위축 흐름이 반전될 여지도 있다. 반대로 정부가 부분 승소할 경우, 로펌 업계의 ‘위험 회피’ 경향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결국 ‘정부 제재 리스크’와 ‘고객‧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고심하는 로펌의 줄타기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기업·지자체·시민단체 등 이해당사자들은 대형 로펌의 의사결정이 미국 법률 시장의 민주적 기능을 어떻게 재편할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