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상하이] 세계 최대 GPU 제조사 엔비디아(Nvidia)가 중국 시장을 위해 새롭게 설계한 인공지능(AI) 추론 전용 칩셋 ‘RTX6000D’의 초기 반응이 예상보다 한산한 것으로 파악됐다. 다수의 대형 기술기업이 아직 본격적인 발주에 나서지 않으면서, 엔비디아가 내건 가격·성능 포지셔닝이 시장의 기대치와 어긋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2025년 9월 16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RTX6000D는 샘플 평가 단계에서부터 ‘가격 대비 효율’ 문제가 제기돼 왔다. 복수의 조달 담당자들은 해당 제품이 실제론 미국 수출 규제로 판매가 금지된 RTX5090 대비 성능이 뒤처지는데도, 개당 약 5만 위안(미화 약 7,000달러)이라는 높은 가격이 책정돼 매력을 떨어뜨린다고 전했다.
특히 템플릿 규제 수치인 1.4TB/s(테라바이트/초) 이하로 메모리 대역폭을 제한한 점이 성능 저하의 직접적 원인으로 꼽힌다. 반면 중국 내 ‘그레이 마켓(grey market)’에서 여전히 유통되는 RTX5090은 절반 이하 가격으로 구입 가능해, 연구개발 및 서비스형 AI(AAI) 스타트업들은 물론 일부 대기업도 법적·윤리적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해당 모델을 택하는 분위기다.
주요 IT기업, ‘H20·B30A’ 상황 주시하며 “관망 모드”
알리바바(Alibaba), 텐센트(Tencent), 바이트댄스(ByteDance)는 이미 Hopper 아키텍처 기반 ‘H20’의 출하 재개 여부 및 Blackwell 아키텍처 기반 ‘B30A’ 승인 상황에 더 주목하고 있다. 세 업체는 H20에 대해 지난 7월 수출 허가가 복원됐지만 실제 선적이 이뤄지지 않아 구매 결정을 미루고 있으며, 성능이 최대 6배 향상될 것으로 예상되는 B30A가 워싱턴의 승인을 받을 경우 ‘가성비’ 관점에서 더 매력적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한 소식통은 “엔비디아가 3분기부터 RTX6000D를 선적하기 시작했지만, 주요 고객사들의 관심은 여전히 H20과 B30A에 쏠려 있다”며 “허가 일정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굳이 RTX6000D에 대규모로 베팅할 유인이 크지 않다”고 말했다.
J.P.모건은 지난달 보고서에서 올 하반기에 RTX6000D가 약 150만 개 생산될 것으로 예상했으며, 모건스탠리도 7월에 200만 개 생산 전망을 제시했다. 하지만 현장 분위기는 이들 셀사이드(투자 은행) 추정치에 훨씬 못 미치는 것으로 전해졌다.
왜 RTX6000D는 ‘비싸다’는 평가를 받을까?
RTX6000D는 최신 Blackwell 아키텍처를 채택했으나, 메모리로 보급형 GDDR을 사용해 1,398GB/s로 대역폭을 억제했다. 미국 상무부가 4월 발표한 ‘Total Processing Performance(TPP)’ 및 ‘Total Interconnect Bandwidth(TIB)’ 기준을 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스펙을 낮춘 셈이다. 일각에서는 “고급 GPU를 일부러 저성능화한 뒤 비슷한 가격대에 파는 방식은 소비자 입장에서 합리적으로 보이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가격 책정의 배경에는 R&D 회수와 제조 단가 상승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특히 중국 판매량이 제한될 리스크를 감안할 때, 엔비디아는 ‘수익성 방어’를 위해 높은 개별 단가를 책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중국 정부의 “국산 반도체 장려 정책”과 맞물려 현지 고객 이탈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규제·정책 변수: 美·中 무역 갈등 속 엔비디아의 난제
중국이 첨단 AI 칩에 접근할 수 있는 범위는 미·중 갈등의 핵심 화두다. 미국은 자국 기술 우위를 지키고자 규제 강도를 조절하고 있지만, 베이징은 자국 기업의 ‘탈(脫)엔비디아’를 장려하며 국내 칩 업체 성장에 힘을 싣고 있다.
9월 16일 중국 시장감독총국은 엔비디아가 반독점법을 위반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추가 조사 방침을 시사했다. 같은 시기 양국 대표단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무역 협상을 진행 중이어서, 업계는 향후 규제 환경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중국 당국은 또한 텐센트·바이트댄스 등 주요 기업을 불러 H20 구매 이유와 데이터 보안 우려를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엔비디아는 “당사 제품은 원격 백도어(backdoor) 기능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공식 반박했으나, 정치·외교적 변수가 여전히 걸림돌로 지적된다.
전문가 해설: ‘추론’과 ‘그레이 마켓’이란?
국내 독자에게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용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AI 추론(Inference)은 이미 학습이 완료된 모델이 실제 서비스를 위해 입력 데이터를 처리·예측하는 과정을 뜻한다. 학습(Training) 대비 연산량이 적지만, 대규모 사용자 요청을 실시간으로 소화해야 해 전력 효율과 대역폭이 핵심 성능 지표로 꼽힌다.
그레이 마켓은 정식 유통망이 아닌 경로를 통해 수입·판매되는 병행·비공식 제품 시장을 의미한다. 중국의 경우, 미국 규제 대상 GPU가 리셀러(재판매업자)를 통하거나 제3국 경로로 유입되는 사례가 빈번하다.
기자 시각 및 전망
엔비디아의 RTX6000D는 ‘제재 회피용 스페셜 버전’이라는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Blackwell 아키텍처라는 최신 기술을 통해 일정 수준 이상의 가치를 제공하려 했다. 그러나 시장 심리는 성능·가격 모두 중途半端(중도반파)라는 인식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는 경쟁사의 국산 AI 칩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H20 출하 재개와 B30A 승인 여부가 중국 AI 생태계 및 엔비디아 실적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중장기적으로는 엔비디아가 글로벌 규제 리스크 분산 전략을 재정립하지 않는 한, 국가별 커스텀 칩 생산→가격 인상이라는 악순환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한편, 환율은 $1 = 7.1207위안로이터 고시 환율을 기준으로 계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