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발(Reuters) – 러시아 정부가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을 향해 러시아 국부 자산을 활용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세기말까지 추적하겠다”고 경고했다. 이는 EU가 동결된 러시아 자금을 우크라이나 지원 재원으로 전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보도가 나온 직후 나왔다.
2025년 9월 15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전 러시아 대통령이자 현 러시아 안전보장회의 부의장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텔레그램 공식 계정에 올린 글에서 “우리 재산을 몰수하려는 브뤼셀의 퇴폐적 유럽인들뿐 아니라 해당 조치를 지지하는 모든 국가를 세기말까지 추적할 것”이라고 밝혔다.
EU 집행위원회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위원장은 유럽에 동결돼 있는 러시아 국부채권 현금 잔액을 우크라이나 방위 자금으로 전용하는 새로운 금융 스키마를 모색 중이다. Politico가 보도한 ‘Reparations Loan(배상 대출)’ 구상에 따르면, 러시아가 보유한 만기 도래 국채 원리금이 유럽중앙은행(ECB)에 입금될 때마다 해당 현금을 우크라이나에 대출 형태로 지원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동결 자산 규모와 구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미국과 동맹국들은 러시아 중앙은행과 재무부 관련 거래를 전면 금지하고, 3,000억~3,500억 달러 규모의 러시아 국부 자산을 동결했다. 상당 비중은 유럽, 미국, 영국 국채 등 국채 포트폴리오로, 유럽 증권 예탁결제기관(Euroclear)에 보관돼 있다.
메드베데프: “모든 가능한 국내외 법정과 비사법적 수단을 동원해 응징하겠다.”
러시아 정부는 이러한 자산 압류를 “서방의 절도”라고 규정하며, 서방 채권·통화 시스템에 대한 신뢰 자체를 무너뜨리는 행위라고 반발해 왔다. 특히 달러와 유로화 기반 국제금융 질서가 정치적 무기로 전락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용어 해설 및 법적 쟁점
주권 자산(Sovereign Assets)은 국가가 외화보유액·채권·예금 등으로 운용하는 국부펀드를 의미한다. 동결(freeze)은 소유권을 유지한 채 처분·이전만 제한하는 행정조치이고, 압류(seizure)는 법원의 결정에 따라 소유권 자체를 강제로 이전하는 사법적 절차다. 러시아는 현재 동결이 압류로 넘어가는 순간 국제법 위반 소지가 커진다고 주장한다.
유럽연합 차원에서는 국제법상 국가면제(State Immunity) 원칙과 신탁통화준칙(Public International Law of Countermeasures) 적용 여부가 핵심 쟁점이다. 러시아는 국제사법재판소(ICJ) 또는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제소를 검토할 수 있지만, EU 회원국과 러시아 간 투자보장 협정의 효력이 일부 종료돼 실효성 논쟁이 예상된다.
시장·정치적 파급 효과
국제 금융 시장에서는 달러·유로 기축통화 신뢰도 하락과 신흥국 외화준비고 다변화 가능성이 주요 리스크로 제시된다. 러시아뿐 아니라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등도 장기적으로 미 국채 비중을 축소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가 회자된다.
정치적으로는 EU 회원국 간 의견 불일치가 불가피하다. 발트 3국·폴란드 등 우크라이나 강경 지지국은 신속한 압류 전환을 주장하지만, 독일·프랑스·이탈리아는 국제법적 선례 악용 및 보복 위험을 우려한다.
전문가 진단
국제금융법 전문가들은 “자산 동결에서 압류로 넘어가는 순간, 미·EU 국채의 ‘무위험 자산’ 지위가 구조적으로 흔들릴 수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ECB가 러시아 자금을 별도 계정으로 전환한 뒤 재대출하는 방안이 실행되면, 양도성예금증서(CD)·레포 시장 등 단기자금 조달 코스트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메드베데프의 초강경 발언은 단순 외교 수사 이상의 신호로 해석된다. 러시아가 실제로 유럽 내 민간 자산 또는 외국인 직접투자(FDI)에 보복성 규제를 가할 경우, ‘상호 차압(Reciprocal Seizure)’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
한편, 러시아 국영미디어 RT는 동결 자산을 통한 우크라이나 지원이 현실화하면 “러시아는 가스·석유 공급 계약의 결제 통화를 완전히 루블·위안화로 전환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RT는 러시아 정부가 후원하는 언론사다.
향후 관전 포인트
1) EU 집행위가 10월 정상회의까지 구체안(배상 대출)을 마련할지 여부.
2) 미국 의회의 ‘러시아 자산 이전 허용법안(RESOLVE Act)’ 심의 추이.
3) G20 재무장관 회의에서 신흥국이 제기할 ‘자산 안전성’ 논의.
메드베데프의 경고는 법적 분쟁뿐 아니라 정치·경제적 후폭풍이 장기화될 것임을 시사한다. 국제사회의 해묵은 질문, 즉 ‘제재가 국제 규범을 수호하는 수단인가, 아니면 세계 금융 시스템 자체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도구인가’라는 논쟁이 다시 한 번 부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