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이 파키스탄을 강타한 기록적 홍수로 인한 인명 피해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곧 진행될 확대기금기구(Extended Fund Facility·EFF) 6차 검토에서 파키스탄 정부의 예산 운용과 긴급 지출 계획이 위기를 해결할 만큼 충분히 유연한지를 집중 평가하겠다고 밝혔다.
2025년 9월 13일,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IMF 파키스탄 상주대표 마히르 비니치(Mahir Binici)는 “올해 재정연도(FY26) 예산, 지출 배분, 비상조항이 홍수로 촉발된 추가 재정 수요를 충분히 충족할 수 있는지를 면밀히 들여다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IMF가 재난 상황을 ‘기후 취약성 시험대’로 인식하고 있으며, 파키스탄 정부가 제시한 예산 유연성(fiscal agility)이 실제로 작동하는지를 평가하는 것이 이번 미션의 핵심 목표라고 강조했다.
972명 사망·농경지 파괴…경제 복구 난제 가중
파키스탄 국가재난관리청(NDMA)에 따르면 현재까지 사망자 수는 972명에 달한다. 이번 홍수는 주 곡창지대인 펀자브(Punjab) 지방을 휩쓸며 농작물·가축·주택을 대거 파괴한 뒤, 남부 신드(Sindh) 지방으로 범람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쌀·설탕수수·면화 등 주요 작물의 수확이 직격탄을 맞아 식료품 가격 급등과 서민 경제 악화가 우려된다.
익명의 현지 애널리스트는 로이터에 “농업 부문 피해로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약 0.2%p 하락할 수 있다”며 “재건 수요가 일부 상쇄 효과를 내겠지만 전반적 성장 둔화는 불가피하다”고 분석했다.*참고: 파키스탄 2024 회계연도 잠정 성장률은 2.4%로 추산됨
통화정책 딜레마…11% 기준금리 동결 전망
홍수로 인한 공급 충격은 파키스탄 중앙은행(SBP)의 통화정책에도 복잡성을 더하고 있다.
로이터가 실시한 최신 설문조사에서 이코노미스트 대다수는 SBP가 16일(현지시간) 통화정책회의에서 기준금리를 현재의 11%로 유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한편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이미 7월 전년 대비 18% 상승해, 추가 인플레이션 압력이 현실화될 경우 금리 인상 카드가 재부상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그러나 경기 둔화 우려도 만만치 않다. 높은 금리는 민간투자와 고용 창출을 압박해 재난 이후 회복 속도를 늦출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 전문가들은 “물가와 성장,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하는 전형적 스태그플레이션 딜레마”라고 지적한다.
IMF 1억4천만 달러 추가 대출, EFF 성공적 이행이 관건
IMF 이사회는 2025년 5월 파키스탄의 기후·재난 복원력 강화를 위해 $14억(약 1조9천억 원) 규모의 신규 대출을 승인했다. 다만 자금 집행은 EFF 프로그램 검토를 성공적으로 통과해야 가능하다. 즉, 이번 6차 미션 결과가 향후 자금 유입 여부를 판가름할 분수령이 되는 셈이다.
확대기금기구(EFF)는 데폴트(채무불이행) 위험이 높거나 구조적 취약성이 큰 국가를 대상으로, 3~4년에 걸쳐 장기·저금리 자금을 지원하면서 거버넌스·재정개혁·통화정책 개선을 병행하도록 설계된 IMF 핵심 구제금융 창구다. 파키스탄은 2019년 7월 EFF 60억 달러 프로그램에 합의했으며, 이 중 남은 할당액을 받기 위해서도 다각적 구조개혁 이행이 필수적이다.
기후 리스크 상위권, 국제사회 지원 시급
독일 싱크탱크 저먼워치(Germanwatch)가 매년 발표하는 글로벌 기후위험지수(Global Climate Risk Index)에서 파키스탄은 최근 20년간 ‘가장 기후취약한 국가 10위권’에 여러 차례 포함됐다. 농업 의존도가 높고 기반시설이 열악해, 폭우·가뭄·폭염 등으로 인한 경제 손실이 극심하다는 평가다.
전문가들은 “파키스탄이 기후변화 대응능력을 키우지 못할 경우 재난 → 경제 충격 → 대외차입 의존 심화라는 악순환이 고착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IMF 역시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을 감안해, 재정지출 투명성 강화·조세기반 확대·에너지 보조금 개편 등을 우선 과제로 제시해 왔다.
전문가 시각: 재원 배분의 ‘민첩성’이 관건
기자가 취재한 복수의 국제금융 전문가들은 “IMF가 강조한 ‘스펜딩 애질리티(예산 집행 민첩성)’는 단순한 회계 기술이 아니라, 중앙·지방정부 간 권한 배분, 조달 절차 간소화, 투명한 집행 시스템을 포괄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빗물이 빠지지 않아 전기가 끊긴 농촌 지역에서는 구호 물자 전달이 지연돼 인도적 위기가 심화되고 있어, 지출 집행 속도와 효율성을 높이는 제도적 장치가 시급하다.
또한 IMF 미션은 재해 대응 목적의 ‘컨틴전시 펀드(contingency fund)’ 사용 내역과 향후 조달 계획을 조목조목 질의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향후 기금 심사뿐 아니라, 국제개발은행·양자 원조 제공국의 추가 지원 결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향후 일정 및 시장 파급 효과
IMF 대표단은 이달 말 이슬라마바드에 도착해 1~2주간 정부 당국자, 중앙은행(SBP), 민간 부문 관계자를 면담한다. 이후 기술적 평가보고서(Staff Report)가 IMF 이사회에 상정되고, 통과 시 긴급 대출분이 순차 집행된다.
외환시장에서는 달러/파키스탄 루피 환율이 홍수 이전 1달러=275루피 선에서 최근 1달러=290루피 안팎까지 상승(루피 가치 하락)했다. 만일 IMF 자금이 예정대로 풀리면 단기 유동성 완화와 환율 안정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으나, 개혁 이행이 지연될 경우 투자심리 위축과 추가 루피 약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론
972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번 홍수는 파키스탄이 직면한 기후·재정 이중 위기의 민낯을 드러냈다. IMF는 ‘애도’와 함께 ‘검증’이라는 이중 메시지를 보냈으며, 향후 EFF 미션은 단순한 자금 심사가 아니라 파키스탄 경제의 생명줄을 가를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예산의 민첩성, 투명성, 구조개혁 의지—이 세 가지가 맞물릴 때만 국제사회 신뢰 회복과 장기적 재난 회복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현지 정책 당국의 전략적 선택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