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크레디트 압박 1년, 코메르츠방크 변화와 독일 금융 주권 시험대

[프랑크푸르트·밀라노] 이탈리아 2위 은행 유니크레디트(UNI-Credit)가 독일 2위 은행 코메르츠방크(Commerzbank)와의 합병 협상 개시를 공개적으로 요구한 지 꼭 1년이 지났다. 그러나 안드레아 오르첼 최고경영자(CEO)의 바람과 달리, 독일 금융권·정치권의 반대 기류는 여전히 견고하다.

2025년 9월 11일, 인베스팅닷컴의 보도에 따르면 유니크레디트는 지난해 9월 11일 기습적으로 코메르츠방크 지분 매입 사실을 공시하며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이후 오르첼 CEO는 “합병에 대해 대화하고 싶다”고 공식 선언했지만, 독일 정부와 금융 규제당국, 노동조합은 외국계 자본의 ‘대표 국책은행’ 인수 시도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유니크레디트의 도전은 코메르츠방크 내부 체질 개선을 촉발했다. 경영진 교체·비용 절감·수익성 제고 등 전면적 개혁이 단기간에 진행됐고, 주가는 1년 새 2배 이상 급등했다. 대카(Deka) 자산운용의 기업지배구조 전문가 안드레아스 토마에는 “코메르츠방크는 이제 몇 년 전과는 전혀 다른 리그에서 뛰고 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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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메르츠방크의 ‘셀프 터닝어라운드’

유니크레디트가 지분을 늘리기 시작한 지 불과 수 주 만에, 코메르츠방크는 재무담당 이사였던 베티나 오를로프를 새 CEO로 전격 승진시켰다. 오를로프 CEO는 전체 3만6,700명 정규직 가운데 3,900명(약 11%) 감원을 포함한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며 독립 노선을 강화했다.

프랭크푸르트 증시에서 코메르츠방크 주가는 유니크레디트의 첫 ‘러브콜’ 이후 100% 이상 상승했다. 같은 기간 유니크레디트 주가 상승률은 83%였다. 가벨리 펀드 산하 글로벌 금융서비스 펀드를 운용하는 이안 라페이는 “오르첼의 개입이 코메르츠방크로 하여금 더 야심 찬 수익률 목표치를 수용하게 만들었다”며 2025년 최우선 매수 종목으로 해당 은행을 꼽았다.

“우리는 대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 계획이 없다는 뜻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의 계획은 명확히 존재한다.” — 안드레아 오르첼, 2025년 9월 프랑크푸르트 금융 콘퍼런스 기조연설 중

현재 코메르츠방크는 순이익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나, 대부분의 유럽 은행과 마찬가지로 기준금리 인상 덕을 받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동시에 비용 대비 수익(C/I) 비율은 56%로, 유니크레디트 독일 법인(HVB)의 37%에 크게 뒤처져 있다※C/I 50% 이하는 ‘우수’, 60% 이상은 ‘개선 필요’로 평가됨.


독일 금융 주권 vs. 유럽 초국경 통합

이번 인수 전초전은 ‘독일 금융 주권 보호’라는 정치적 명분과 ‘유럽 은행 산업 재편’이라는 시장 논리가 충돌하는 대표적 사례다. 독일은 과거 도이체방크·코메르츠방크 합병 무산, 차이나화은(중국투자공사)의 도이체방크 증자 참여 제한 등에서 자국 금융 인프라 방어에 적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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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ss-border M&A(국경 간 인수·합병)는 자본 확충과 규모의 경제 달성을 위한 유럽 은행권의 오랜 숙원이다. 그러나 규제 체계와 정치 리스크가 걸림돌로 지목돼 왔다. 이번 사례가 성사될 경우, 유럽연합(EU) 단일 금융시장을 향한 중요한 전례가 될 수 있다.


향후 일정과 관전 포인트

코메르츠방크 이사회와 감사·감독위원회는 이달 말 연례 전략회의를 열어 중·장기 경영 청사진을 확정할 예정이다. 회의 결과에 따라 △독립 노선 고수 △부분 지분 매각 △유니크레디트와의 협상 재개 등 여러 시나리오가 거론된다.

오르첼 CEO는 “변화의 가속이 필요하다”며 지속적인 압박을 예고했다. 업계는 ▲독일 정부의 태도 변화 ▲EU 감독·경쟁 당국의 승인 가능성 ▲노동조합 및 주주총회의 반응 등을 핵심 변수로 꼽는다.


알아두면 좋은 용어

C/I 비율: Cost to Income Ratio의 약자로, 은행이 1유로의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투입하는 비용을 뜻한다. 비율이 낮을수록 효율적 경영을 의미한다.

HVB: HypoVereinsbank의 약칭으로, 유니크레디트가 2005년 인수한 독일 현지 법인이다. 유니크레디트 그룹의 독일 영업을 총괄한다.

Cross-border M&A: 국가를 초월한 기업 인수·합병을 의미하며, 특히 금융 산업에서는 규제 체계와 정부 승인 절차가 복잡해 성공 사례가 드물다.


전문가 시각

금융 M&A 전문 변호사 클라우스 그루버는 “독일 정부가 국내 은행 시스템 안정성을 이유로 거래를 거부할 수도 있지만, EU 경쟁법상 ‘경제적 정당성’을 입증하면 승인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일부 애널리스트들은 “코메르츠방크 주가에 구조조정 가치는 이미 선반영돼 있어, 추가 상승 여력은 제한적”이라고 경계했다.

결국 양사 모두에게 ‘시간’이 변수다. 유니크레디트는 적기 매수 기회를 노리고, 코메르츠방크는 더 높은 평가를 받기 위해 자구(自救) 성과를 입증해야 한다. 유럽 금융 시장은 이 ‘밀고 당기기’가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