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 주식 선택가들이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사모펀드(PE) 운용사로 유명한 아폴로 글로벌 매니지먼트의 수석이코노미스트 토르스텐 슬럭(Torsten Slok)은 최근 보고서에서 상장기업 수가 줄어드는 동시에 시장에 데뷔하는 기업들의 ‘나이’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2025년 9월 9일, 인베스팅닷컴의 보도에 따르면 슬럭 이코노미스트는 “1999년 새로 상장한 기업들의 중간 연령은 5년에 불과했으나, 2022년에는 8년으로 높아졌고 현재는 14년까지 치솟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러한 변화가 단순히 2022년 미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급격한 금리 인상 여파가 아니라,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비상장 상태를 유지하려는 전략적 선택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슬럭은 “기업들이 상장을 의도적으로 미루는 것은 ①공개기업이 감내해야 할 회계·공시 규제, ②분기 실적 압박, ③감독기관의 지속적인 감시 등 ‘공개 신분’의 부담을 회피하려는 목적”이라고 지적했다.
“벤처캐피털(VC), 사모펀드, 그 외 대규모 사적 자본이 풍부해지면서 기업들은 굳이 일찍 상장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상장 지연이 가져온 시장 구조의 변화
기업들이 사적 자본(private capital)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공모시장(public market)은 점점 ‘소수 초대형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슬럭은 “패시브 전략(passive strategy)이 확산되고 상관관계가 높아질수록 특정 거대 기술주에 수익이 집중되고 있다”며, “결과적으로 상장시장에서 알파(alpha)를 창출할 여지가 거의 사라졌다”고 말했다.
알파란 ‘시장 평균 수익률을 초과 달성하는 초과수익’을 의미한다. 주식 운용 업계에서는 펀드매니저의 실력을 가늠하는 핵심 지표로 쓰인다. 반면 패시브 전략은 ETF·인덱스펀드처럼 특정 지수를 그대로 추종해 시장 수익률을 그대로 받아가도록 설계된 기법이다. 슬럭이 지적한 ‘알파 고갈’은 곧 액티브 펀드매니저의 입지가 줄어든다는 뜻이다.
숫자로 보는 상장 연령 변화
아래 이미지는 슬럭이 제시한 IPO Age 그래프다. 1999년 5년이었던 중간 상장 연령이 22년 만인 2021~2022년 8년으로 상승했고, 2025년에는 14년에 육박했다는 추세를 보여준다.
이는 벤처 단계에서 대규모 자금을 유치해 충분한 성숙기를 거친 후 상장하는 기업이 많아졌음을 시사한다. 동시에 이는 일반 개미투자자가 가장 역동적인 성장 구간에 접근하기 어려워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투자 전략의 재편: 사모시장으로 눈 돌려야 하나
슬럭은 “공개시장에 남은 알파가 없다”고 단언하며, 고수익을 추구하는 투자자라면 전통적 종목선택(스톡피킹) 전략 대신 사모시장(private market)으로 관심을 돌려야 할 가능성을 제시했다. 사모시장은 높은 위험과 낮은 유동성이라는 단점이 있지만, 정보 비대칭성과 기업별 편차가 크기 때문에 차별화된 성과를 낼 여지가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사모시장 투자는 최소 투자금이 크고 회수 기간이 길어 개인투자자에게는 진입 장벽이 높다. 전문가들은 △사모펀드 세컨더리펀드 △프리 IPO 펀드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등 대안적 접근 방식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전문가 시각: ‘음악은 느려졌지만 파티는 끝나지 않았다’
슬럭은 “공개시장 파티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음악이 느려졌다”는 표현으로 상장시장의 활력을 비유했다. 실제로 2024~2025년 미국 증시는 엔비디아,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 소수 빅테크가 지수를 견인한 반면, 중소형주와 신규 상장주는 상대적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이는 국내 투자자에게도 시사점을 던진다. 코스피·코스닥 시장 역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대형 반도체주 비중이 높아지면서 ‘승자 독식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상장 연령의 고령화가 글로벌 공통 현상이라면, 벤처·스타트업 단계의 사모 투자 생태계가 확대되지 않을 경우, 일반 투자자의 알파 창출 기회는 더욱 제한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투자자들은 분산 투자와 자산별 역할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공개시장에서는 저비용 패시브 상품으로 ‘베타 수익’을 추구하되, 일부 자금을 사모·대체투자에 배분해 구조적 알파를 확보하는 전략이 부상할 전망이다.
용어 해설
알파(α): 포트폴리오가 시장 기준(벤치마크)을 얼마나 초과했는지를 나타내는 값. 0보다 크면 초과수익을 얻었다는 의미다.
패시브 전략: 시장지수 추종형 ETF·인덱스펀드 등, 주식·채권지수와 동일한 수익률 달성을 목표로 하는 운용 방식.
액티브 전략: 종목·섹터 분석을 통해 시장평균 대비 초과수익을 노리는 운용 방식. 운용보수가 높고 리스크가 크지만, 알파 창출을 기대할 수 있다.
사모시장(Private Market): 증권거래소에 상장되지 않은 비상장주식, 사모펀드, 벤처투자 등을 포괄하는 시장. 공시 의무가 없고 정보 접근성이 낮아 전문성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