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연방대법원의 보수 성향 판사인 에이미 코니 배럿(Amy Coney Barrett)이 미국이 헌법적 위기에 직면했다는 주장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광범위한 행정명령이 사법부와 충돌하면서 법적 경계가 시험대에 오르고 있지만, 헌법 질서는 여전히 견고하다고 강조했다.
2025년 9월 5일, 인베스팅닷컴(Investing.com)의 보도에 따르면, 배럿 대법관은 이날 뉴욕 링컨센터(Lincoln Center)에서 열린 북토크 행사에서 “나는 현재 미국이 헌법 위기 상태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헌법이 실제로 무력화되고 법의 지배(rule of law)가 무너질 때 비로소 위기라 부를 수 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이어 “우리나라는 여전히 법치주의에 헌신하고 있으며 법원이 제 기능을 하고 있다”고 말해 청중의 주목을 받았다. 이날 행사는 배럿 대법관의 신간 『Listening To The Law』(9월 9일 출간 예정) 홍보 투어의 일환으로, 온라인 언론 매체 ‘더 프리 프레스(The Free Press)’ 설립자인 저널리스트 바리 와이스(Bari Weiss)가 무대에서 대담 형식으로 진행했다.
트럼프 행정부와 법원의 갈등 – “격렬하지만 전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5년 1월 재집권 이후 연방 정부 재편, 이민 단속 강화, 다양성 프로그램 폐지, 관세 부과 확대 등 일련의 일방적 조치를 단행해 왔다. 그 과정에서 수백 건의 소송이 제기됐고, 연방법원은 일부 정책을 일시 중단하거나 속도 조절을 명령해 왔다. 특히 3월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추방 관련 소송을 담당한 판사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구해 사법부 독립 논란을 촉발했다.
배럿 대법관은 이러한 갈등에 대해 “현재 미국은 뜨거운 사회적·정치적 논쟁의 시기에 놓여 있지만, 과거에도 비슷한 경험을 겪은 바 있다”며 역사적 맥락을 강조했다. 그는 “격렬한 의견 대립은 민주주의의 일부이며, 제도적 균형이 유지되는 한 즉각적인 헌정 붕괴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Right now we’re in a time of passionate disagreement in America. But we have been in times of passionate disagreement before.” — Amy Coney Barrett
보수화된 대법원과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례 폐기
배럿은 2020년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 전 대법관 서거 이후 지명·임명돼, 현재 6대 3의 보수 우위 구도를 굳혔다. 그는 합류 이후 미국 사회 전반에 큰 반향을 일으킨 보수적 판결—헌법상 낙태권 폐지(2022년), 총기 소유권 확대, 종교 자유 강화, 대학 입학전형 인종 고려 금지—등에 기여했다.
특히 2022년 ‘도브스 판결’로 알려진 결정은 1973년의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어 낙태에 대한 연방 차원의 헌법적 권리를 박탈했다. 이로써 18개 주가 임신 초기에 낙태를 금지하거나 사실상 전면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프로그램을 연구하는 굿마커연구소(Guttmacher Institute) 자료에 따르면 수백만 명의 여성에게 직접적인 의료·사회적 영향이 미쳤다.
배럿은 이 같은 결정이 여론과 괴리된다는 지적에 대해 “여론을 판결에 반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답했다. 실제로 2024년 로이터/입소스(Reuters/Ipsos) 조사에서 ‘낙태가 거의 모든 경우 합법이어야 한다’고 답한 미국인은 57%로, 2014년 46%에서 11%p 증가했다.
‘헌법 위기’란 무엇인가? – 용어 설명
‘헌법 위기(Constitutional Crisis)’는 통상 정부 각 부(입법·행정·사법)가 헌법적 권한을 두고 심각하게 충돌하거나, 법적·제도적 절차가 마비되어 헌법이 제 기능을 못 하는 상황을 뜻한다. 배럿은 “법원이 명령을 내렸는데 행정부가 노골적으로 이를 거부하거나, 의회가 기능 불능 상태에 빠져 헌법적 권력 균형이 깨질 때 비로소 위기라 부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은 행정부와 사법부 간 갈등이 커 보이지만, 결국 판결은 집행되고 있으며 제도적 프레임워크가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위기론’을 일축했다.
전문가 시각 — 기자 해설
배럿 대법관의 발언은 보수 진영의 헌정 질서 수호론과 진보 진영의 사법 독립 위기론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시점에서, 최고 사법기관 구성원의 시각을 직접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소송에 패소할 경우 이를 수용할지 여부가 사실상 위기 발생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기 때문이다.
한편, 배럿 대법관은 판결마다 여론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재차 천명해, 향후 대법원이 낙태 외에도 투표권·환경규제·노동권 등 분야에서 추가적인 보수적 판결을 내릴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는 정치·사회적 파급력이 큰 이슈마다 ‘사법부 vs. 국민 여론’ 구도가 형성될 수 있음을 예고한다.
결론적으로, 배럿 대법관은 미국 제도적 장치가 여전히 작동 중임을 강조하며 위기론을 반박했으나, 동시에 대법원 보수화에 따른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음을 사실상 인정했다. 따라서 미국 민주주의의 견고함을 유지하는 열쇠는 행정부와 사법부 간 상호 존중, 그리고 시민사회의 합리적 공론이라는 점이 재확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