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 ‘특혜 철회’ 한 줄 속에 숨어 있는 구조적 전환
9월 3일(현지시각) 미국 상무부는 아시아 3대 파운드리·메모리 기업이 중국에 보유한 공장에 적용돼 오던 Validated End User(VEU) 신속 수출 허가 제도를 전격 취소했다. 표면적으론 ‘장비 반입 때마다 개별 허가서를 새로 받으라’는 행정 고시이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지도를 근본부터 다시 그리게 할 가장 장기적이고 심층적인 구조 변곡점이다.
1. 사건 개요와 핵심 포인트
- 대상 기업: TSMC 난징 12인치 팹(28㎚), SK하이닉스 우시(D램·낸드), 삼성전자 시안(V낸드)
- 조치 내용: 2026년 1월 1일부터 모든 미국산 장비·소프트웨어·기술 반입 시 건별 허가 필요
- 시한과 예외: 기존 설비 유지·보수는 허용, 신·증설·미세공정 업그레이드는 사실상 차단
이 조치는 지난 2022년 10월 ‘10·7 대(對)중국 장비 규제’의 후속 라운드로, 바이든 행정부가 예외 승인을 통해 ‘중국 내 생산조정 소프트랜딩’을 유도하던 기조를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단칼에 뒤집은 셈이다.
2. 美 수출통제 30년사로 본 맥락 – 대이란·러시아와는 다른 ‘총체적 봉쇄’
미국이 전략물자 수출을 막아 온 역사는 194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반도체 장비·EDA·IP 차단 같이 생산능력 자체를 겨냥한 전면 봉쇄는 중국이 사실상 최초다. 과거 이란·러시아 제재 역시 완제품·소프트웨어가 주 타깃이었지, 극자외선(EUV) 노광기·원자층식각(ALD) 장비처럼 첨단 제조 장비를 끊어 버린 사례는 없었다.
즉, 이번 VEU 철회는 ‘1차 제재: 장비 판매 금지 → 2차 제재: 이미 설치된 라인의 확장 금지’라는 단계적 압박의 완결판에 해당한다.
3. 글로벌 공급망 지도 재편 – 3대 축으로 나뉘는 ‘반도체 블록’
블록 | 핵심국 | 주요 생산 공정 | 정책 수단 | 장기 리스크 |
---|---|---|---|---|
미·동맹권 | 美·日·대만·韓·EU | 5㎚ 이하 EUV, HBMe/DDR6 | CHIPs Act·IRA·국방물자법 | 자국보조금 인플레, 노동력 공급 |
중국·러 + GCC 일부 | 中·러·사우디 | 28~55㎚, D램 1zn | ‘중국판 CHIPs’·대체 SW | 장비·소프트웨어 자립 병목 |
비동맹·혼합권 | 인도·베트남·이스라엘 | OSAT·팹리스 설계 | 법인세 인하·토지 인센티브 | 정치·전력 인프라 불안 |
VEU 철회는 두 번째 블록이 ‘미세공정 사다리’를 더 이상 오를 수 없음을 의미한다. 단기적으로는 28㎚ 생산이 지속되지만, AI·고성능 컴퓨팅 시장 점유율을 장기적으로 확대하기는 요원해진다.
4. 美 주식·ETF에 미칠 구조적 영향
4-1. 장비주 – ‘중국 피봇’에서 ‘온쇼어링·듀얼소싱’ 수혜주로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KLA·램리서치 등 장비 3대장이 과거 매출의 20~40%를 중국에서 벌어왔다는 점에서, PE 다중이 한때 위축됐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필자는 증시가 장비주 밸류에이션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본다:
- CapEx 전환: 중국을 대체하는 美 애리조나·텍사스, 日 구마모토, DE 드레스덴 공장 건설로 동일·유사 장비 수요가 이연돼 재차 발생한다.
- 서비스 매출 비중 확대: 구독형 SaaS 공정 모니터링, AI 분석 툴 등 신규 고마진 모델들이 중국이 아닌 동맹권 고객사를 주 타깃으로 급성장 중이다.
4-2. 메모리 – ‘낸드 황금기’와 ‘D램 수급 쇼크’의 시차
시안 V낸드 라인 증설이 봉쇄되면, 2026년부터 글로벌 낸드 Tbit 기준 설비 캐퍼가 연평균 6% 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서버·스마트폰·AI 데이터센터의 저장 수요는 연 18% 증가세가 유지될 전망이다. 이는 2027~2028년 낸드 ASP 슈퍼사이클을 예고한다. 반대로, 중국 우시 D램은 아직 1zn 레벨이므로 미국이 추가로 16Gb DDR6 라인까지 규제할 경우, D램 시장 쇼크가 2028년 이후 나타날 잠재 리스크로 남는다.
4-3. 파운드리 – EUV 단일 공급체제의 프리미엄 확대
ASML 한 회사만이 공급 가능한 EUV 노광 장비는 대만·미국·일본 3곳에만 실질 반입이 허용된다. 따라서 TSMC, 삼성전자 Pyeongtaek·Taylor, Intel Ohio는 모두 정부 CapEx 보조금+차등 세액공제를 받을 유력 후보가 됐다. 결과적으로 S&P500 에서 반도체 CapEx 지출 총액은 2024년 1,400억 달러 → 2028년 2,100억 달러로 CAGR 10.6%가 예측된다.
5. 중국 반응 및 ‘탈(脫)서구’ 가속 변수
① 장비 내재화: 中 Shanghai Micro Electronics (SMEE)가 28㎚ DUV 노광기를 양산했지만, EUV 양산 기술 N/A (0.33 NA) 도달까지는 최소 7~8년이 소요될 전망이다.
② 국산 소재·부품·공정(i-n-p-m) 패키지: 비소(As) 없이도 고주파 특성을 유지하는 갈륨산화물 FET 연구가 속도, 그러나 TSMC·삼성의 양산 노하우 격차를 좁히기엔 불충분.
③ ‘핀셋 보복’ 시나리오: 희토류·흑연 수출 라이선스 전략, 핵심 금속 갈륨·저마늄 이미쿼터제 유지.
필자는 중국이 ‘미세공정 직접 추격’보다 후공정 OSAT·HBM 패키징 및 선단 SiC 전력반도체로 연구개발 초점을 옮길 것으로 본다. 이는 결국 고성능 CPU/GPU 영역은 서구권, 전력·아날로그 영역은 중국 및 비동맹권으로 기능 분업이 극단화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6. 동맹국 정책 시나리오 — 한국·대만·일본·EU
한국: ‘K-CHIPs 법’ 재정 이후 2030년까지 세액공제율 25% 유지. 단, 시안 V낸드가 성장전략의 발목을 잡을 경우 → 삼성·SK 국내 라인 재투자 가속.
대만: 대만 CHIP Act 2.0 도입, 소재·장비 R&D 투자 25% 세액공제. 노 EUV 보호 배타 제도.
일본: RAPIDUS (2㎚ 파운드리 컨소시엄) 정부 지원 누적 1조엔 돌파, 구마모토 TSMC 2공장 5.6억 달러 추가 보조금 발표.
EU: 2024년 100억 유로 규모 반도체 조성·조달 펀드 출범, Intel Magdeburg 팩토리 보조금 승인.
요컨대, ‘투자 유치 인플레이션’이 본격화된다. 국가는 보조금, 기업은 인건비·부품비 증가를 감수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소비자가 지불하는 전자제품 단가로 전가될 공산이 크다.
7. 중장기 거시경제·인플레이션 경로
IMF 자료에 따르면 첨단 반도체·화웨이 제재·AI GPU 딜레이 등이 글로벌 IT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효과는 2028년까지 총 CPI 0.4%p 상승 요인으로 추정된다. 미국 Fed 입장에서는 ‘친환경 전환+엔지니어링 리쇼어링 인플레’에 이어 3번째 구조적 상방 압력 요소가 된다.
채권시장 역시 이미 반응했다. 10년물 BEI(Breakeven Inflation)는 재차 2.56%로 상승, term premium 역추세 확대가 명확하다. 장기 금리는 고착화되고, 성장주의 할인율은 구조적으로 높아지는 흐름이 예고된다.
8. 투자 전략 — 3단계 포트폴리오 리밸런싱
Step 1 : ‘동맹권 CapEx 모멘텀’ 선점
- ASML·Tokyo Electron·Lam Research – EUV·ALD 독점 지위
- KLA·Onto Innovation – 프로세스 관리 SaaS 로열티
- Applied Optoelectronics – 광모듈 후행주, 데이터센터용 400G VCSEL
Step 2 : ‘낸드 슈퍼사이클’ 대비 – 패키징·컨트롤러
낸드 공급자가 축소되면 P/E 역사적 평균 11배인 컨트롤러·테스트 OSAT 기업 (Silicon Motion, ChipMOS)에 재평가 여지가 발생한다.
Step 3 : ‘오버행 리스크’ 해지 – 달러·인플레 연동
- 미 10년 BEI 3.0% 돌파 시 TIPS ETF (예: TIP, VTIP) 비중 5% → 10%로 확대
- 원자재 지수 (BCOM) 상관 βJ-PY 0.72 활용해 USDJPY 롱·구리 롱 페어거래
9. 결론 – ‘반도체 블록화’는 피할 수 없는 뉴노멀
VEU 특혜는 애초 ‘중국 내 이미 깔린 라인의 연착륙 장치’였다. 그마저 사라졌다는 사실은 미·중 기술전쟁이 ‘연착륙 시나리오’를 공식 폐기했음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소비자는 더 비싼 전자제품을, 기업은 더 큰 CapEx와 R&D 비용을, 정부는 더 많은 보조금을 감내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다.
필자는 ‘공급망 짧아지기(shrinkflation)’가 향후 10년간 인류 경제사의 핵심 키워드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이번 조치를 단순한 기업 단기 실적 변수로 읽어선 안 된다. 이는 산업·정책·지정학·거시경제가 얽힌 ‘총체적 상호의존 관계’의 리셋이며, 투자자는 이제 수요 주도형 성장주가 아닌 공급망·자본집약형 가치주가 이끄는 뉴패러다임에 대비해야 한다.
© 2025 Deep Macro Insight / 칼럼니스트 김도현 P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