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아이레스발(Reuters) – 아르헨티나의 자유지상주의 성향 하비에르 마일레이 대통령이 재정 균형을 내세우며 공립병원 추가 예산 법안을 거부하겠다고 공언하면서, 오는 10월 26일 중간선거에서 의회 장악력을 확대하려는 그의 정치적 구상에 심각한 위험 요인이 떠올랐다.
2025년 8월 29일,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마일레이 정부는 초인플레이션을 두 자릿수로 낮추는 성과를 앞세워 높은 지지율을 유지해 왔지만, 공공 지출 대폭 삭감이 국가 의료 체계를 흔들면서 민심이 급격히 이반하는 조짐이 포착되고 있다.
특히 세계적 수준의 소아 외과·장기이식 전문기관으로 평가받아 온 가라한(Garrahan) 아동병원은 인력 감축과 진료 지연 사태로 상징적 전장(戰場)이 됐다. 병원 직원들은 “2023년 말 대비 실질임금이 약 50% 감소했고, 다수 의료진이 더 높은 보수를 찾아 민간 부문으로 이탈했다”는 현실을 호소한다.
■ 여당·야당 힘겨루기…98백만 달러 추가 지원안 놓고 대치
야당이 다수인 의회는 연 9,800만 달러(약 1,330억 원) 규모의 공공의료 추가 예산안을 가결했으나, 대통령 대변인은 “재정 흑자를 해칠 어떤 법안도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마일레이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최근 여론조사들은 이러한 결정이 집권 초기 높은 지지율을 잠식하며 중간선거 전략에 ‘자충수’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산안드레스대학(Universidad de San Andrés)이 7월 발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53%가 ‘가장 불만족스러운 정책’으로 정부의 보건 정책을 꼽았다. 이는 경제, 교육, 치안 등 9개 핵심 현안을 제치고 1위를 기록한 수치다.
“가라한 병원에 입사하는 것은 축구 국가대표 발탁과도 같았다. 하지만 임금 격차 때문에 팀이 해체되고, 더 이상 최상의 진료가 불가능해졌다.” – 산티아고 웰러, 가라한 병원 비뇨기과 과장
아르헨티나는 중간선거에서 하원 의석의 절반과 상원 의석의 3분의 1을 새로 선출한다. 마일레이 대통령은 현 소수 여당 지위를 벗어나 더 큰 교두보를 확보해야만 친(親)시장 개혁·무역 자유화 입법을 신속히 통과시킬 수 있다.
■ 투자자 관망세…“의회 지지 확보 여부가 관건”
국제 금융시장은 “아르헨티나가 오랜 ‘시장 기피국’ 오명을 벗어날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만일 여당이 중간선거에서 참패하면, 긴축 재정·규제 완화 드라이브가 표류해 투자 심리에도 찬물을 끼얹을 가능성이 높다.
현지 여론은 벌써부터 경고음을 내고 있다. 컨설팅사 시노프시스(Synopsis)는 8월 조사에서 응답자의 68%가 공립병원 증액안 거부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별도 조사기관 주반 코르도바(Zuban Córdoba)의 이번 달 설문에서도 79%가 가라한 의료진에 공감한다고 답했으며, 마일레이 지지층 가운데서도 60%가 동조했다.
토르콰토 디 텔라 대학교의 ‘정부 신뢰지수’ 역시 7월 대비 13.6% 하락해 대통령 지지세가 꺾이고 있음을 보여 준다.
■ 공공의료 체계의 ‘보석’ 가라한, 인력 10% 이탈
국가공무원노조(ATE)에 따르면 가라한 병원은 올해만 직원의 10%를 잃었다. 2025년 예산이 10% 인상되지만, 아르헨티나 예산행정협회(ASAP)가 추정한 물가상승률 27.3%를 크게 밑돈다.
20년 전 가라한에서 샴쌍둥이 분리 수술을 받은 자녀를 둔 파블로 웡(46) 씨는 “공공의료가 아니었다면 수많은 수술 비용을 감당할 방법이 없었다”며 “지금은 진료를 이어갈 병원을 찾아 수도와 부에노스아이레스주를 전전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공중보건 전문가 페르난도 싱만 전 유니세프 아르헨티나 보건국장은 “아르헨티나 국민의 40%가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공공의료에 의존한다”며 “정부는 민간 진료를 감당하지 못하는 계층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 배경 해설: 가라한 아동병원은 무엇인가
가라한 아동병원은 1987년 개원한 국가 운영 소아 전문 병원으로, 장기이식 성공률과 희귀난치성 질환 진단·연구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쌓아 왔다. 복잡·대형 수술이 가능한 최신 설비를 갖추고 있으며, 남미 전역에서 환자가 몰려드는 ‘최후의 보루’로 불린다. 최근 재정 위기로 외과의·간호사·재활전문가등 핵심 인력이 빠져나가자 의료계는 “국가 브랜드 가치가 무너질 수 있다”고 잇따라 경고하고 있다.
한편 사설 의료기관 아우스트랄(Austral) 병원 완화의료과장 니콜라스 스티코 박사는 “공립 병원 급여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지난해 이직했다”며 “민간 부문은 소아 전문의에게 공공 부문의 거의 두 배를 지급한다”고 말했다.
■ 향후 전망
오는 9월 7일 부에노스아이레스주 지방선거는 전통적 페론당(Peronist) 텃밭이어서, 결과에 따라 전국 민심의 풍향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8월 마일레이 대통령 차량에 돌을 던지는 시위가 발생한 것도, 여당이 직면한 현장의 분노를 단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거부권 행사가 물가 안정 성과를 지켜낼 방패인지, 아니면 보건 붕괴로 인한 ‘정치적 부메랑’이 될지”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중간선거가 다가올수록, 마일레이 정부는 재정 준칙과 사회적 보호 간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고난(苦難)의 외줄타기를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