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너베리(스코틀랜드)—2025년 7월 27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스코틀랜드 터너베리 골프클럽에서 만나 새 무역 합의 발표 직후 악수를 나눴다. 두 정상의 만남은 장기간 이어진 통상 갈등에 일단락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세계 시장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2025년 8월 21일, CNBC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양측은 그동안 뜨거운 논란거리였던 자동차·제약·반도체 관세를 포함한 세부 규정을 이날 공개했다. 이번 발표는 7월 말 타결된 기본 합의가 실제 어떻게 집행될지를 보여주는 첫 공식 문서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합의문에 따르면 미국은 EU산 제품에 대해 일률적으로 15% 이내에서 관세를 부과하되, 최혜국대우(MFN) 관세율과 15% 중 더 높은 세율을 적용하기로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과거 경고했던 30% 혹은 100%의 초고율 관세에 비하면 대폭 완화된 수치다.
합의 배경과 주요 수치
이번 합의는 불과 몇 주 전 양측이 전격 서명한 에너지·투자 패키지의 세부 이행 방안을 다룬다. EU는 미국산 에너지 7,500억 달러어치를 구매하고, 600억 달러 이상을 미국 내에 추가 투자하기로 약속했다. 미국은 그 대가로 EU 제품에 대한 전면적 고율 관세를 철회했다.
그러나 유럽 정치·경제계는 여전히 합의가 “불균형적”이라는 우려를 내비쳤다. 특히 EU 기업들은 ▲미국의 섹션 232* 조사, ▲디지털 서비스세(DSA) 등 규제 리스크가 남아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자동차 부문 15% 관세는 27.5%에 비하면 나아졌지만, 독일 완성차 기업에 연간 수십억 달러의 부담을 안길 것”—독일자동차산업협회(VDA)
*섹션 232는 미국 무역확장법 232조를 뜻한다. 국방·안보 위협 판단이 내려지면 대통령이 고율 관세나 수입 제한을 단독으로 단행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다. 2018년 철강·알루미늄 관세 사태가 대표적 사례다.
세부 품목별 조치
① 자동차 — EU산 완성차·부품에 대해 조건부 15% 관세가 부과된다. 단, 브뤼셀이 자국 산업용 관세를 추가로 인하하는 법안을 발의하기만 해도 미국은 해당 관세를 적용한다. 이는 ‘법안 발의’ 자체가 거래 조건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② 제약 — 유럽은 미국의 제약 원료 최대 공급원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대 250% 관세 위협까지 시사했으나, 최종적으로 15% 상한에 합의했다. 또 9월 1일부터는 제네릭(복제약)에 한해 MFN 관세만 적용한다. 이는 미국 내 약가를 다른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내린다는 ‘국가약가연동제’(Drug Pricing Policy)의 일환이다.
③ 반도체·목재 — 한때 100% 관세가 거론됐던 반도체도 상한은 15%로 결정됐다. 목재 역시 같은 상한을 적용받는다.
④ 비관세 범주 — 코르크·항공기·항공기 부품·일부 화학전구체 등은 MFN 세율만 적용돼 사실상 관세 혜택을 받는다.
에너지·국방·디지털 규제
EU는 향후 7,500억 달러 규모의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를 포함한 에너지 구매를 “의도하고 기대한다(intend & expect)”고 표현했다. 즉, 법적 구속력은 없다는 점이 다시 한 번 확인됐다.
방위 부문에서도 EU는 미국제 무기·장비 조달을 “대폭” 확대할 계획이다. 이는 유럽 각국이 자주국방 기조를 강화하는 와중에 미국 무기에 의존도를 높이는 모순적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번 문서에는 EU가 구글·애플 등 빅테크를 겨냥해 시행 중인 디지털서비스법(DSA) 조항의 변경은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빅테크 규제 문제는 여전히 양측 갈등변수가 될 전망이다.
전문가 시각과 시장 영향
국제통상 전문가들은 “15%라는 상한 설정은 불확실성 제거 효과가 크다”면서도 “EU가 약속한 에너지·투자 액수가 실현되지 않을 경우 미·EU 갈등이 재점화될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한다.
금융시장 측면에서 유럽 자동차·제약·반도체주는 단기 불확실성 해소로 완만한 반등이 기대된다. 다만 관세 15% 자체가 실적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불가피해, 향후 실적 시즌에 다시 조정이 올 가능성도 제기된다.
무역 정책 일정을 감안하면, 9월 1일 MFN 관세 발효 시점과 2026년 미 대선 레이스가 맞물리며 정치적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미국 내 제조업 유턴(리쇼어링)을 촉진하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가 유지되는 한, 글로벌 공급망 재편 압력은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용어 설명
· 최혜국대우(MFN) — 상대국에 적용되는 가장 낮은 관세율을 모든 교역 상대에 동일하게 부여한다는 세계무역기구(WTO) 원칙이다.
· 디지털서비스법(DSA) — EU가 2024년부터 시행 중인 빅테크 규제법으로, 불법 콘텐츠 삭제 의무와 시장 지배력 남용 방지 조항을 담고 있다.
· 제네릭 의약품 — 특허가 만료된 오리지널 의약품과 동일 성분·효능을 가진 복제약이다. 약가를 낮추는 역할을 해 각국 보건당국이 장려한다.
향후 전망
관세 상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구매·투자 이행 여부, 빅테크 규제, 약가 인하 압박 등 잔존 쟁점이 많다. 합의가 단계별·조건부로 설계된 만큼, 향후 협상 결과에 따라 세율이 재조정될 가능성이 상존한다.
또한 미국이 연이어 추진 중인 인도·태평양 국가 및 북미-중남미 협상에서도 유사한 ‘15% 상한-에너지 패키지’ 모델이 적용될 경우, 글로벌 통상 질서에 새로운 기준점이 형성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