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유럽 각국 지도자들이 최근 알래스카에서 개최된 미·러 정상회담(2025년 8월 14~16일)에서 도출된 우크라이나 평화 협상 진전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2025년 8월 21일, 인베스팅닷컴 보도에 따르면, 라브로프 장관은 이날 모스크바 외무부 청사에서 열린 정례 브리핑에서 “소위 ‘의지 있는 국가들의 연합(coalition of the willing)’이 알래스카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사안의 초점을 흐리려 하고 있다”면서 유럽 측 행보를 강하게 비판했다.
알래스카 정상회담은 미국 알래스카주 앵커리지에서 2025년 8월 14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됐으며,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 라브로프 장관이 직접 마주 앉아 우크라이나 휴전 로드맵 및 안전 보장 프레임워크를 논의한 첫 고위급 교섭이라는 점에서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았다. 당시 양측은 ‘충분히 검토할 만한 초안(outline)’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구체적 내용은 비공개로 남아 있다.
라브로프 장관은 이날 “유럽 지도부가 자신들만의 안보 보장 논의를 진행하며 갈등의 근본 원인(root causes)을 외면하고 있다”면서 “
‘유럽식 모험주의’가 실패로 돌아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장관은 특히 프랑스·폴란드·발트 3국 등이 주도해 온 이른바 ‘안보 우산 구상’을 겨냥, “러시아가 배제된 채 우크라이나 안보를 논하는 것은 건설적·지속가능한 합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는 언제든 정직한 안보 대화에 임할 준비가 돼 있지만, 2022년 이스탄불 대화 당시 제시된 틀에서 벗어나는 안은 무망(無望)하다”고 못 박았다.
이른바 ‘이스탄불 대화’란 2022년 3월 말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대표단이 초안에 합의했던 휴전 문서를 가리킨다. 해당 문서는 ①우크라이나의 중립국화, ②외국군 기지 금지, ③다자 안보 보장 체계 구축 등을 골자로 했으나, 이후 양측 입장차가 커져 채택되지 못했다.
라브로프 장관은 또 “우크라이나가 지속 가능하고 장기적인 해결책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면서 “키이우 정부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주도하는 분쟁 해결 노력마저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그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추진 중인 구체적 로드맵이나 이번 알래스카 회담에서 오간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coalition of the willing’이란?
라브로프가 사용한 ‘의지 있는 국가들의 연합’은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국 주도로 결성된 다국적 파병 동맹을 일컫던 외교 용어다. 현재 문맥에서는 우크라이나 문제에 적극적 개입 의사를 밝힌 유럽 국가들을 비유적으로 지칭한 것으로 풀이된다.
전문가 분석
모스크바 카네기유럽센터의 알렉산드르 가브리엘라 연구원은 “러시아가 유럽을 압박해 협상 테이블에 복귀시키려는 전략적 메시지”라면서 “안보 보장 구상이 유럽 중심으로 굳어질 경우 러시아의 영향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계산”이라고 진단했다. 반면, 키이우 국립대학 국제정치학과 이리나 체르노모르 교수는 “러시아가 근본 원인 운운하며 사실상 전쟁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제사회의 반응은 엇갈린다. 유럽연합(EU) 외교안보대표부는 이날 별도 논평에서 “어떠한 합의도 우크라이나의 주권·영토 보전 원칙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실 역시 “알래스카 회담의 긍정적 모멘텀을 살리려면 모든 당사자가 선의로 협상해야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향후 전망
라브로프 장관의 발언은 알래스카 회담 이후 후속 실무협상 일정을 두고 미·러 간 이견이 표출된 가운데 나왔다. 외교가에 따르면, 양국은 9월 초 스위스 제네바에서 차관급 협의를 재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나, 유럽 주요국이 동참할지 여부가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알래스카 회담이 실질적 돌파구로 이어지려면 미·러·유럽 간 이해관계 조정이 필수”라고 입을 모았다.
결국 알래스카 회담을 계기로 다시 불붙은 평화 논의는 ‘안보 보장’이라는 핵심 의제를 둘러싼 러시아·유럽의 주도권 경쟁이 어떻게 정리되느냐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