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판사, 트럼프 행정부의 엡스타인 대배심 기록 공개 요청에 “주의 분산용” 일축

사진 : 1997년 플로리다 팜비치의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제프리 엡스타인(왼쪽)과 도널드 트럼프가 함께 포즈를 취한 모습Davidoff Studios Photography | Archive Photos | Getty Images

2025년 8월 20일, CNBC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미국 연방판사 리처드 버먼(Richard Berman)은 수요일 제프리 엡스타인 관련 대배심(grand jury) 자료의 비공개 유지 결정을 내리며, 이를 공개하라는 트럼프 행정부의 요청을 “정부가 이미 보유한 방대한 자료로부터 시선을 돌리려는 주의 분산(diversion)”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버먼 판사는 판결문에서 “정부는 이미 엡스타인 사건에 대해 100,000쪽 가량의 문서‧인터뷰‧증거물로 구성된 방대한 자료(trove)를 확보했으며, 이는 대배심 문서 70여 쪽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라고 지적했다. 또한 “행정부가 엡스타인 기록을 일반에 공개하는 데 법원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으며, 스스로 공개하겠다고 약속해놓고 지난 7월 입장을 번복했다”라고 덧붙였다.


대배심(grand jury)이란 무엇인가?

대배심은 일반 배심원단과 달리, 범죄 혐의가 있는지 여부를 검토해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미국 사법제도의 특별 기구다. 기밀 보장이 핵심이어서 통상적으로 증언·증거·기록은 비공개로 유지된다. 따라서 공개 요청을 받아들이려면 ‘특별하고 중대한 사유’가 반드시 요구된다.


버먼 판사의 핵심 판단

버먼 판사는 “정부가 엡스타인 파일을 종합적으로 공개하는 것이 논리적”이라며, “이번 대배심 자료 공개 신청은 정부가 가진 방대한 자료의 범위‧의미를 희석시키려는 시도”라고 강조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대배심 기록을 공개하려는 세 번째 실패로, 앞서 플로리다·뉴욕 연방판사들도 동일 사유로 요청을 기각한 바 있다.

“정부는 이미 광범위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공개할 권한도 갖고 있다. 대배심 기록 70여 쪽은 10만 쪽 분량의 정부 문서 규모에 비하면 미미하다.” — 리처드 버먼 판사


배경: 세 차례의 ‘연쇄 기각’

플로리다 연방판사는 7월 23일, 2008년 소아 성매매 혐의로 유죄를 인정했던 엡스타인 사건의 대배심 기록 공개를 “법률상 허용되지 않는다”며 기각했다. 이어 8월 11일 뉴욕 연방판사 폴 엥걸마이어(Paul Engelmayer)는 기슬레인 맥스웰(Ghislaine Maxwell) 사건 대배심 기록 공개 요청을 “새로운 사실을 밝힐 가능성이 실질적으로 없다”며 부당하다고 판시했다.

엥걸마이어 판사는 트럼프 행정부가 “대배심 문서가 범죄 실체에 새 빛을 비출 것”이라는 “명백히 허위 premiss”를 내세웠다고 직격했다. 이로써 트럼프 행정부는 엡스타인 관련 3건의 대배심 공개 소송에서 모두 패소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공개’ 약속과 번복

트럼프 대통령은 후보 시절 엡스타인 파일을 전면 기밀 해제(declassify)하겠다고 공언했다. 법무부는 2025년 2월 ‘1단계 공개’라며 일부 서류를 내놨지만, 새로운 정보는 거의 없었다. FBI는 7월 6일 unsigned memo에서 “추가 공개는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법무부는 7월 중순,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로 대배심 기록 확보‧공개를 추진했다. 그러나 법원 패소가 이어지면서 엡스타인 파일 자체 공개가 가장 현실적인 해법으로 거론되고 있다.


정치적 파장 확대

민주당의 딕 더빈(Dick Durbin) 상원의원은 지난달 FBI가 엡스타인 기록 중 ‘트럼프와 관련된 모든 문서’를 ‘플래그(flag)’하라는 내부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5월 팸 본디(Pam Bondi) 법무장관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엡스타인 기록에 대통령 이름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고 보고했다고 보도했다. 또한 WSJ은 2003년 엡스타인 50세 생일 때 제작된 편지첩에 트럼프 서명이 들어간 외설적 메시지(bawdy message)가 포함됐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부인하며 WSJ와 루퍼트 머독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엡스타인과 트럼프의 관계

엡스타인과 트럼프는 과거 사적으로 교류했으나, 엡스타인이 2019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교도소에서 자살(suicide)하기 수년 전 결별한 것으로 알려졌다. NBC가 공개한 1992년 아카이브 영상에는 두 사람이 파티에서 함께 춤추는 모습이 담겨 있다.

1992년 NBC 아카이브 영상 화면


전문가 시각

법조계에서는 “법원이 대배심 기록 공개를 일관되게 기각함에 따라, 행정부가 보유한 10만 쪽 문서를 어떤 범위로 공개하느냐”가 핵심 쟁점이 될 것으로 본다. 기존 판례에 비춰 볼 때, 정부 스스로 결정권을 행사하지 않는 한 일반 대중이 엡스타인 수사 기록을 확인할 가능성은 작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과정에서 내세운 ‘투명성’ 약속이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어, 정치적 공방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또한 이번 결정은 사법부의 독립성을 재확인했다는 평을 받는다. 법원이 ‘특별하고 중대한 사유’ 없이 대배심 비밀을 깨뜨릴 수 없다는 원칙을 명시함으로써, 정치적 압력과 사법 절차 사이의 경계선이 선명해졌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용어 정리

Grand Jury — 미국 연방 및 일부 주에서 운영되는 예비심사 제도로, 검사가 제시한 증거를 토대로 기소 여부를 결정한다. 공개 재판이 아니기 때문에 증언‧증거 등이 비밀로 유지되며, 이를 공개하려면 법원이 ‘공익‧정의 실현’ 등을 이유로 특별히 허가해야 한다.

Trove — 본문에서는 ‘방대한 자료 더미’를 뜻하며, 대규모 문서·증거의 축적물을 묘사할 때 주로 사용된다.


기사 작성 기준: 2025년 8월 20일 20시 02분 33초 GMT (한국시간 8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