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워싱턴] 유럽연합(EU)이 미국과 지난달 발표한 잠정 무역 합의를 공식화하기 위한 공동성명 채택을 놓고 디지털 규제 문구를 둘러싼 마찰이 극대화되고 있다. EU는 자국의 온라인 규제 체계가 미국의 협상 압박으로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막판 조정에 나섰으며, 이에 따라 성명 채택이 예정보다 지연되고 있다.
2025년 8월 17일, 파이낸셜타임스(FT) 보도에 따르면 양측은 “비관세 장벽(non-tariff barriers)”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기술하느냐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미국 측은 EU 디지털 서비스법(DSA)을 비관세 장벽에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EU 집행위원회는 이를 “레드라인”으로 규정하며 수용 불가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미국은 DSA가 자유로운 표현을 억압하고 미국 빅테크 기업에 과도한 비용을 부과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EU는 온라인 환경을 보다 안전하고 공정하게 만들기 위한 핵심 입법이라며 후퇴할 여지가 없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비관세 장벽이란?
비관세 장벽은 관세가 아닌 규제·인증·표시 요건 등으로 무역 비용을 증가시키는 모든 제도적 장치를 의미한다. 관세율 인하가 이뤄져도, 각종 규제 차이가 남아 있으면 사실상 새로운 장벽이 형성될 수 있어 통상 협상에서 가장 민감한 쟁점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디지털 서비스법(DSA) 핵심
DSA는 혐오 발언·아동 성착취물 등 불법 콘텐츠를 플랫폼이 선제적으로 차단·삭제하도록 의무화한다. 위반 시 연간 글로벌 매출의 최대 6%에 달하는 벌금이 부과될 수 있어, 메타·알파벳·아마존 등 미국계 대형 IT 기업들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이번 분쟁은 7월 27일 스코틀랜드 턴베리 골프클럽에서 발표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간의 합의 후속 절차에서 불거졌다. 당시 양측은 EU산 대부분 제품에 대한 15% 수입관세를 적용하기로 해 30% 부과 위기에서 한발 물러섰고, 전면적 무역전쟁을 가까스로 피한 것으로 평가됐다.
“DSA 완화는 절대 불가” — EU 집행위 고위 관계자
FT는 또, EU 집행위가 8월 15일까지 미국산 자동차에 매겨진 27.5% 관세를 15%로 인하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 서명을 기대했지만, 미국 측 관계자가 공동성명 확정 전까지는 서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했다고 전했다.
이번 지연으로 자동차·항공·기계 등 주요 업종의 교역 일정도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특히 유럽 자동차업계는 미국 시장에서의 가격 경쟁력 회복을 위해 관세 인하 시점을 주시해 왔으나, 불확실성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전문가 시각
글로벌 통상 전문가는 “EU가 앞서 도입한 일반개인정보보호법(GDPR)에 이어 DSA까지 완화한다면 규제 주도권을 잃게 된다”며 “미국도 자국 기술기업의 비용 부담을 덜어주려는 정치적 계산이 분명해 합의까지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고 진단했다.
또 다른 분석가들은 “이번 협상은 단순 관세 문제가 아니라 디지털 주권과 플랫폼 거버넌스를 둘러싼 21세기 규범 경쟁”이라며 “결국 어느 한쪽이 의미 있는 양보를 하지 않으면 타결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EU는 공동성명 확정 이후에도 DSA를 포함한 디지털 규제 강화 기조를 이어갈 계획이다. 집행위는 연말까지 불법콘텐츠 차단 가이드라인 세부안을 발표하고, 위반 기업에 대한 첫 제재 사례를 내년 상반기에 도출한다는 로드맵을 공개한 바 있다.
미국 정부는 자국 내 정치 상황도 복잡하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기업 경쟁력”과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는 보수층, 그리고 “플랫폼 책임”과 “소비자 보호”를 강조하는 진보층 간에 첨예한 의견 차가 존재한다. 따라서 백악관이 DSA 완화를 명시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대외 압박과 동시에 내년 선거 전략의 일환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번 갈등이 장기화될 경우, 세계 교역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는 EU·미국 간 공급망에 새로운 변동성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한국을 포함한 3국 기업들은 부품·소재 조달 비용과 통관 절차 변화를 사전에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