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자국의 디지털 규제 체계를 보호하기 위해 미국과의 무역 성명 채택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2025년 8월 17일, 로이터 통신은 파이낸셜타임스(FT) 보도를 인용해 EU와 미국이 지난달 잠정 합의한 무역 협정을 공식화할 공동 성명문을 아직 확정하지 못한 배경에 ‘비관세 장벽(non-tariff barriers)’ 관련 문구 이견이 있다고 전했다.
FT에 따르면 미국 측은 EU의 디지털 규제 역시 비관세 장벽에 포함된다고 주장했으나 EU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문구 충돌이 성명 발표를 지연시키는 핵심 요인이라는 게 FT의 설명이다.
● 핵심 쟁점: EU의 ‘디지털 규칙’
EU는 디지털 시장법(Digital Markets Act·DMA)과 디지털 서비스법(Digital Services Act·DSA) 등 강력한 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2023년부터 본격 시행해 왔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이들 법안을 자사 활동에 불리한 규제로 인식하고 있어, 워싱턴은 협상 과정에서 해당 규제를 ‘무역장벽’ 항목에 명시하길 원해 왔다.
● 비관세 장벽이란?
비관세 장벽은 관세가 아닌 규제·표준·인허가·검역 등 다양한 제도로 교역을 제한하는 조치를 뜻한다. 관세 인하가 진행된 글로벌 통상 환경에서 비관세 장벽은 국가 간 무역 갈등의 주요 축으로 부상했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EU는 ‘디지털 규제’를 자국 내 소비자 보호와 시장 공정성 확보를 위한 합법적 정책 수단으로 정의하며, 이를 비관세 장벽 목록에 포함시키는 데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규제 준수 비용이 과도하게 높다며 자국 기업의 시장 접근성을 훼손한다고 보고 있다.
“디지털 규제를 포괄적 무역장벽 범주에 넣는 선례가 만들어질 경우, EU의 전체 규제 모델이 도전받을 위험이 있다.” — EU 고위 관계자(FT 인용)
● 성명 지연의 파장
EU·미국 양측은 2025년 7월 개최된 무역·기술 이사회(TTC)에서 철강·알루미늄 관세 문제와 비관세 규제 프레임워크 초안을 포함한 포괄적 협정에 ‘원칙적 합의’에 도달했으나, 최종 문안 확정을 위한 공동 성명은 한 달 넘게 미뤄지고 있다.
로이터는 현재까지 FT 보도를 독자적으로 검증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이번 보도는 EU-미국 간 규제 협력 논의가 얼마나 미묘한 균형에 놓여 있는지 보여준다.
● 전문가 시각
브뤼셀 소재 싱크탱크 ‘유럽정책센터(EPC)’의 한 연구원은 “EU는 자율적 규제권을 지키려 하고, 미국은 자국 기업 보호를 우선한다”며 “서로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마다 일시적 타협은 가능하지만, 장기적 규범 경쟁은 피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경제학자들은 디지털 규제가 무역 합의 문서에 어떻게 정의되는지가 향후 글로벌 전자상거래 표준에 중대한 선례가 될 것으로 본다. 특히, 다른 국가·지역 블록도 EU 모델을 참고하거나 미국 입장을 지지하면서 ‘규제 러시’ 혹은 ‘규제 완화’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 향후 일정 및 관전 포인트
양측 협상단은 9월 초로 예정된 TTC 실무회의 전까지 문구 조율을 마무리하겠다는 방침이다. 디지털 규제 조항의 최종 표현 방식, 분쟁 해결 절차, 발효 시점 등이 핵심 쟁점으로 남아 있어, 일정이 추가로 미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EU의 규제 주권과 미국의 기업 경쟁력 사이 이해충돌이 얼마나 절충될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