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세 억만장자 주디 포크너, ‘10계명’으로 의료 IT 제국을 일군 비결

Judy Faulkner

“상장하지 말 것, 인수·합병을 하지 말 것, 소프트웨어는 반드시 잘 작동할 것.” 미국 위스콘신주 베로나에 자리 잡은 에픽시스템즈(Epic Systems) 본사 화장실과 휴게실 벽에는 이렇게 굵게 인쇄된 ‘10계명’이 붙어 있다. 1천670에이커(약 2.1㎢)에 달하는 캠퍼스 곳곳에서 직원들은 이를 일종의 경전처럼 되새긴다.

2025년 8월 16일, CNBC 뉴스 보도에 따르면 에픽시스템즈를 46년째 이끌고 있는 최고경영자(CEO) 주디 포크너(Judy Faulkner)는 이 10계명을 토대로 연 매출 57억 달러(약 7조5천억 원) 규모의 글로벌 의료 소프트웨어 회사를 구축했다. 그는 1979년 한 주택 지하실에서 회사를 창업한 뒤 현재까지 지분 43%를 보유하고 있으며, 포브스 기준 순자산은 78억 달러(약 10조2천억 원)로 세계 430위 억만장자다.

포크너가 ‘빌 게이츠와 윌리 웡카의 합체’로 불리는 이유는 기술적 통찰과 괴짜적 상상력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의 본사는 ‘오즈의 마법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해리 포터’ 등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28개 테마 건물로 꾸며져 있다. 깊이 5층, 1만1천석 규모의 지하 강당 ‘딥 스페이스(Deep Space)’에서는 매달 전 직원 회의가 열리는데, 직원들은 이를 농담 삼아 “워크 처치(work church)”라 부른다.

1. 소프트웨어 제국의 3대 금기

에픽의 10계명 가운데 첫 세 조항은 상장 금지, 인수·합병 금지, 완벽 작동이다. 포크너는 “분기 실적에 얽매이는 ‘쿼터의 독재(tyranny of the quarter)’를 겪고 싶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는 벤처캐피털 자금도, 월가의 조언도 받지 않았다. 대신 고객 만족에 대한 집착, 즉 ‘소프트웨어가 실제 병원 현장에서 문제없이 돌아가는가’만을 기준으로 삼았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마다 ‘이게 옳은 일인가’라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 주디 포크너

2. 전자건강기록(EHR) 시장의 절대강자

EHR(Electronic Health Record)은 환자의 진단·투약·검사 결과 등을 디지털화한 시스템이다. 2024년 기준 미국 급성기 병원의 42%가 에픽의 EHR을 사용하며, 23% 점유율의 오라클 헬스(구 서너·Cerner)를 두 배 가까이 앞선다. 에픽은 “전 세계 3천3백 개 병원, 7만1천 개 클리닉, 3억2천5백만 명의 환자가 우리의 소프트웨어를 이용한다”고 밝힌다.

그러나 사용자 경험(UI/UX)과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을 둘러싼 불만도 적지 않다. 상호운용성이란 서로 다른 기관·벤더 간에 환자 데이터를 자유롭게 주고받는 능력을 뜻한다. 미국에서는 개인의 건강정보를 보호하는 연방법 HIPAA(건강보험 이동과 책임에 관한 법)로 인해 데이터 교환이 더욱 복잡하다.

3. ‘에픽 왕국’ 지키는 승계·지배 구조

올해 82세 생일을 맞은 포크너는 아직 은퇴 일정을 밝히지 않았지만, 이미 ‘트러스트 프로텍터 위원회(The Trust Protector Committee)’라는 3인 감시기구를 세워 사후에도 에픽이 비상장·독립 기조를 유지하도록 설계했다. 그의 의결권 주식은 사후 가족 및 오랜 직원 5명으로 구성된 신탁에 넘어가며, 위원회는 규정 위반 시 신탁위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권한을 갖는다.

차기 CEO에 대해 포크너는 “소프트웨어 개발자 출신의 장기 재직자”라고만 언급했으나, 업계에서는 1998년 입사해 ‘마이차트(MyChart)’를 개발한 49세 사장 수밋 라나(Sumit Rana)를 유력 후보로 본다.

4. 고객 밀착 전략과 혹독한 업무 문화

에픽은 마케팅 부서조차 두지 않고 입소문에 의존한다. 그 대신 각 병원마다 ‘BFF(Best Friend Forever)’라는 전담 직원을 지정해 24시간 상시 지원한다. 트리니티 헬스(Trinity Health)의 마이크 슬루보스키 CEO는 “포크너에게 이메일을 보내면 한두 시간 안에 답장이 온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시간 근무와 번아웃 역시 유명하다. 이코노미스트가 2025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19개 산업 900개 기업 가운데 에픽은 소프트웨어·IT 서비스 부문 ‘워크라이프 밸런스’ 최하위를 기록했다. 회사 측은 “직원 평균 주당 근무 시간은 44~45시간, 2024년 이직률은 7%”라고 반박한다.

5. 잇단 소송과 ‘데이터 영토주의’ 논란

에픽은 지난해 데이터 스타트업 파티클 헬스(Particle Health), 올해 관리형 의료서비스 기업 큐어IS(CureIS) 등으로부터 독점·거래 방해 혐의로 피소됐다. 오라클 부사장 켄 글루크는 블로그에서 “에픽 CEO 주디 포크너는 EHR 상호운용성 최대 걸림돌”이라고 비판했다. 에픽은 “근거 없는 주장”이라며 법적 대응 방침을 밝혔다.

6. 디즈니 월드 같은 본사 캠퍼스

Lou’s Soda Fountain

28개 건물은 ‘스토리북’ ‘위자드 아카데미’ ‘프레리’ 등 소규모 캠퍼스로 묶여 있으며, 설계는 디즈니 테마파크를 다수 담당한 Cuningham Group이 맡았다. 건물마다 비밀 통로, 미끄럼틀, 나무집, 초콜릿 공장 모형이 있고, 화장실 80여 개의 타일·조명까지 포크너가 직접 확인했다고 건축가는 전했다.

방문객이 가장 먼저 들르는 ‘앨리스’ 건물에는 천장이 바닥, 바닥이 천장인 ‘거꾸로 방’이 있다. 서터 헬스(Sutter Health) 워너 토머스 CEO는 “처음 방문했을 때 슬라이드를 타고 내려갔다”며 “어른들을 위한 놀이동산 같았다”고 말했다.

7. ‘베팅 더 랜치’—병원이 감수하는 리스크

EHR 도입은 한 병원의 전산·재무 시스템을 통째로 갈아엎는 대규모 사업이다. 뉴욕대 랑곤 헬스(NYU Langone Health)의 로버트 그로스먼 CEO는 “우리는 에픽에 농장을 통째로 걸었다(bet the ranch)”고 표현했다. 성공 여부가 병원 존폐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에픽의 강점은 도입 후 ‘현장 밀착’ 지원이다. 배프티스트 헬스(Baptist Health)의 마이클 메이요 CEO는 “에픽 직원들은 이곳 간호사·의사들과 함께 밤을 지새우며 시스템을 맞춤 설정했다”고 회상한다.

8. ‘우연한 창업자’의 통찰

포크너는 자신을 “우연한 CEO(accidental CEO)”라 부른다. MBA 학위는 없지만, “예산? 필요하면 사라, 필요 없으면 사지 말라”는 간단명료한 원칙을 고수한다. 2015년 그는 워런 버핏·빌 게이츠가 주도한 ‘기빙 플레지(Giving Pledge)’에 서명해 재산 99%를 기부하기로 약속했으며, 2020년 가족재단 ‘루츠 앤 윙스(Roots & Wings)’를 설립해 저소득층 아동·가정을 지원하고 있다.

9. 전문적 관점과 전망

전문가들은 AI·클라우드 전환이 가속화되는 향후 10년이 에픽에 ‘두 번째 결정적 순간’이 될 것으로 본다. 대규모 언어모델(LLM) 기반 임상 지원 도구, 원격 모니터링 데이터 통합 등에서 얼마나 개방적 생태계를 구축하느냐가 관건이다. 필자는 “에픽이 폐쇄적 구조를 고집한다면, 오픈 API를 내세운 빅테크·스타트업 연합이 점유율을 잠식할 수 있다”고 본다. 반대로 에픽이 특유의 고객 밀착 운영 경험을 AI 서비스에 접목한다면, ‘메디컬 오퍼레이팅 시스템’으로서 지위를 공고히 할 가능성도 크다.

결국 포크너의 말처럼 “옳은 일을 할 용기”가 에픽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독립 기조를 유지한 채 전 세계 환자 3억 명의 데이터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플랫폼’—그것이 82세 창업자가 남긴 최대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