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엔비디아(Nvidia)와 체결한 이례적 합의는 수십 년간 유지돼 온 미국의 국가안보 중심 수출 통제 체계를 뒤흔드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으로의 인공지능(AI) 칩 수출 재개를 허용하는 대가로 엔비디아가 중국 내 해당 칩 매출의 15%를 미국 정부에 ‘통행세’ 형식으로 납부하도록 했다.
2025년 8월 11일, 인베스팅닷컴의 보도에 따르면, 이번 결정은 미 기업·투자자·정부 관계자 모두에게 새로운 ‘국가안보 리스크’를 창출하며 향후 기술·통상 정책의 불확실성을 크게 키웠다.
역사적으로 미국 정부는 국가안보를 이유로 민감 기술의 수출을 통제해 왔다. 이러한 결정은 사실상 절대적으로 간주돼, 기업이 돈으로 규제를 우회할 수 없다는 불문율이 존재했다. 통제 대상이면 ‘판매 불가’가 원칙이었고, 놓친 해외 매출이 아무리 크더라도 예외는 없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에 그 문법을 깨뜨렸다. 그는 월요일 브리핑에서 엔비디아의 ‘H20’ AI 칩을 중국에 판매하도록 허용하는 대신, 해당 칩을 비롯한 일부 고급 반도체 제품 매출의 15%를 미국 정부가 확보한다고 밝혔다. 같은 조건은 AMD(Advanced Micro Devices)에도 적용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플래그십 ‘블랙웰(Blackwell)’ 칩의 다운그레이드 버전 역시 중국 판매를 허용할 의향이 있다고 언급했다. 이는 자국 정부가 특정 제품의 사양·가격·판매처에 직접 개입한 드문 사례다.
불과 몇 달 전, 트럼프 행정부는 H20 칩의 중국 판매를 국가안보 이유로 전면 금지했다가 7월에 이를 번복했다. 당시 정부는 희토류 협상의 일환이라고 설명했지만, 이번 합의가 다시 등장하면서 정책 일관성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다.
“수출 통제는 국가안보의 최전선 방어다. 기술 판매 허가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면 안 된다.” — 존 물레나르(John Moolenaar) 미 하원의원, 공화당·미시간
라자 크리슈나무르티(Raja Krishnamoorthi) 하원의원(민주·일리노이)은 “안보를 가격표로 매긴다면, 중국과 동맹국 모두에 미국의 안보 원칙이 ‘협상 대상’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준다”고 경고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H20 재판매가 가져올 안보 위험이 ‘미미(marginal)’하다고 주장한다. 허워드 루트닉(Howard Lutnick) 상무장관은 CNBC 인터뷰에서 H20을 “엔비디아의 네 번째 좋은 칩”이라며 중국 기업이 계속 미국 기술을 쓰는 것이 “미국 이익”이라고 강조했다.
● ‘수출세(Export Tax)’ 논란…합법성은?
이번 조치는 미국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정부-기업 매출 공유’ 모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간 미 기업 CEO에게 투자 압박과 중국 관련 인맥 문제로 인텔 CEO 교체 요구 등 기업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해 왔다.
하지만 헌법은 연방의회가 주(州)로부터의 수출품에 세금·관세를 부과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무역 전문 변호사 제러미 일루리언(Jeremy Iloulian)은 “수출세로 볼지, 다른 방식의 대가로 볼지는 계약 내용을 더 봐야 한다”면서도 “오늘날까지 ‘수출 라이선스 가격표’는 없었다”고 밝혔다.
캘리포니아대 샌디에이고캠퍼스(UCSD) 카일 핸들리(Kyle Handley) 교수는 “보기에 따라선 명백한 수출세”라며 “정부가 매출 일부를 ‘위에서 살짝 긁어 가는 듯한 구조”라고 진단했다.
엔비디아 대변인은 “우리는 미국 정부가 정한 규칙을 따른다”고 답했으며, “H20을 수개월간 중국에 출하하지 않았지만, 미국이 중국 시장에서도 경쟁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AMD 측도 “미 정부 승인을 받아 일부 AI 프로세서를 중국에 수출 중”이라면서, 매출 공유 합의 여부는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 ‘모든 것이 흥정’…학계·시장 시각
코넬대 사라 크렙스(Sarah Kreps) 교수는 “현 행정부에서 모든 것이 협상 가능해 보인다”며 “이 같은 합의가 마지막이 아닐 것”이라고 예상했다.
“경사가 가파른 미끄러운 경로(slippery slope)다. 중국행 프로세서 마진이 5~15%포인트 깎일 수 있고, 엔비디아·AMD 전체 마진도 1%포인트 희석된다.” — 번스타인 애널리스트
가벨리 펀드 포트폴리오 매니저 헨디 수산토(Hendi Susanto)는 “전략 제품을 중국에 파는 모든 업계가 ‘15% 모델’이 자신들에게도 적용될지 주목하고 있다”며 “기업에는 부담이자, 동시에 거대 중국 시장을 ‘보존’할 수 있는 생명줄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 용어·배경 설명
수출 통제(Export Controls)란, 무기·반도체·AI 알고리즘 등 전략물자가 적대국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가 라이선스를 부여하거나 금지하는 제도다. 냉전 시절부터 미국이 주도해 왔으며, 기업이 ‘돈’을 내도 우회가 불가하다는 점이 핵심이었다.
H20·블랙웰 칩은 엔비디아의 데이터센터용 GPU 라인업으로, 고성능 AI 연산이 필요한 모델이다. H20은 전 세대 제품이지만 여전히 클라우드·연구용으로 연산 효율이 높다. 블랙웰은 최신 아키텍처로, 국방·금융·생명공학 등 초고속 연산 수요가 많은 분야에서 각광받고 있다.
● 기자의 시각
이번 ‘15% 합의’는 정부가 국가안보 논리를 넘어, 수출 통제로 재무적 이익까지 추구하는 새로운 선례를 남겼다. 단기적으로는 미국 반도체 기업 실적 방어와 중국 고객 유지라는 실용적 효과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안보·통상 정책의 가격화가 제도화될 경우, 동맹국·적성국 모두가 ‘협상 테이블’에 대가를 올려놓고 요구하는 구조가 정착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중장기적으로 글로벌 공급망 안정성과 기술 패권 경쟁에 새로운 불확실성을 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