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발(Paris)—유럽 전역에 산재한 석탄·천연가스 화력발전소가 노후 설비라는 꼬리표를 떼고, 마이크로소프트·아마존 등 빅테크의 데이터센터로 재탄생할 준비를 하고 있다. 발전소 부지에는 이미 대용량 전력 인입선과 냉각용 수자원이 확보돼 있어, 대규모 연산 설비를 빠르게 구축하려는 IT 기업에게 매력적인 해법으로 부상하고 있다.
2025년 8월 5일, 인베스팅닷컴 보도에 따르면 프랑스의 앙지(Engie), 독일의 RWE, 이탈리아의 에넬(Enel) 등 주요 전력기업은 인공지능(AI) 확산이 촉발한 전력 수요 급증을 기회로 삼아, 가동 중단 예정 발전소를 데이터센터로 전환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 중이다. 이를 통해 폐쇄 비용 부담을 덜고, 동시에 신규 재생에너지 투자에 필요한 장기 전력판매계약(PPA)을 확보하겠다는 복안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발전소 부지는 허가·인프라가 이미 갖춰져 있어 ‘스피드 투 파워(speed to power)’를 달성할 수 있다는 점이 핵심 경쟁력”
이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전력망(grid) 신규 연결 절차가 최대 10년 이상 걸리는 사례가 빈번하다. 반면 기존 발전소 부지를 활용하면 전력·수처리·열 회수 인프라가 그대로 남아 있어 시간과 비용을 대폭 단축할 수 있다.
전력회사, ‘데이터센터 맞춤형’ 수익 모델 모색
전력사 입장에서 데이터센터 사업은 단순 부동산 매각을 넘어, 고정적이면서도 높은 수익률을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캐시카우가 된다. RWE 글로벌 파트너십 총괄 사이먼 스탠턴은 “장기적 파트너십은 인프라 투자 리스크를 줄여주면서도 꾸준한 현금흐름을 보장한다”고 강조했다.
비영리단체 ‘비욘드 포실 퓨얼(Beyond Fossil Fuels)’ 자료에 따르면, EU와 영국 내 석탄·갈탄발전 153기는 2038년까지 폐쇄가 예정돼 있다. 2005년 이후 이미 190기가 문을 닫은 상황이어서, 전력사-IT 기업 간 협업은 더욱 속도를 낼 전망이다.
데이터센터 운영사들이 원하는 ‘친환경 전력’에 대한 프리미엄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프랑스 데이터센터 기업 OVH의 그레고리 르부르 환경프로그램 국장은 “테크 기업은 MWh당 최대 20유로의 추가 비용을 지불하며 재생에너지를 확보하려 한다”고 말했다. ※MWh(메가와트시): 1메가와트 전력을 1시간 동안 생산·소비할 때의 에너지 단위
‘에너지 파크’ 개념 부상
일부 전력사는 구(舊)발전소 부지에 재생에너지 단지와 데이터센터를 동시에 조성하는 ‘에너지 파크’ 모델을 검토 중이다. 평상시에는 풍력·태양광으로 전력을 공급하고, 긴급 상황에서만 기존 송전망을 활용해 안정성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다만 업계에서는 “아직 시범 단계”라는 신중한 반응이 나온다.
앙지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설비용량을 현재 46GW에서 두 배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세바스티앵 아르볼라 데이터센터 사업부 사장은 “전 세계 40개 후보지를 물색 중이며, 대표 사례로 호주 해즐우드(Hazelwood) 석탄화력발전소 부지를 검토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에넬, 포르투갈 EDP, 프랑스 EDF 등도 가동 중단 혹은 관망 중인 가스·석탄발전소를 데이터센터용으로 시장에 내놓고 있다. 전략 컨설팅사 아서디리틀(Arthur D. Little)의 마이클 크루즈 파트너는 “이는 명백한 비즈니스 모델 다각화”라며 “전력사가 자산 효율성을 높이는 동시에 새로운 수익원을 확보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빅테크 ‘속도 경쟁’…전력 직공급 모델도 등장
IT 업계가 노후 발전소 부지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는 결국 ‘시장 선점’이다. S&P 글로벌 코모디티 인사이트의 샘 헌팅턴 리서치 디렉터는 “빅테크는 조기 가동 가능성이 있는 프로젝트에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준비가 돼 있다”며 “‘속도’가 곧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기업 JLL도 독일 폐석탄발전소 부지(2.5GW 규모)와 영국 내 4곳의 부지 전환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세부 고객 정보는 보안 문제로 공개되지 않았다.
영국 드랙스(Drax)는 요크셔 소재 옛 석탄발전소 일부를 파트너사와 함께 데이터센터로 개발할 계획이다. 드랙스는 발전소가 생산한 전력을 ‘비하인드 더 미터(behind-the-meter)’ 방식으로 데이터센터에 직접 공급하고, 필요 시에는 송전망에서 전기를 끌어오는 구조를 제안했다. 프랑스 EDF 역시 중부·동부 지역 가스발전소 2곳에 대해 개발사를 선정했다.
주요 용어 해설
• PPA(전력구매계약): 전력 공급자와 수요자가 장기간(통상 10년 이상) 전력 공급 가격·물량을 사전에 확정하는 계약.
• 비하인드 더 미터(Behind-the-meter): 발전 설비와 수요처가 계량기(미터) 이전 구간에서 직접 전력 거래를 하는 방식으로, 송배전망 사용료를 절감할 수 있다.
• 스피드 투 파워(Speed to power): 전력 인프라에 조속히 접근해 설비를 빠르게 가동하려는 전략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