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반도체가 미·중 갈등의 핵심 지정학적 현안으로 부상하면서, 인공지능(AI) 분야를 선도하는 미국의 엔비디아(Nvidia) 역시 그 중심에 설 수밖에 없었다. 미국과 중국이 첨단 기술 패권을 두고 갈등을 이어가는 상황에서, 두 국가 모두에게 중요한 GPU(그래픽 연산 장치) 공급망이 집중된 엔비디아의 행보는 국제 정세와 경제 판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25년 7월 21일, CNBC 보도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최근 워싱턴의 사실상 ‘승인’ 속에 중국 내 H20 칩 판매를 재개했다. 이 조치는 미국이 주도하던 AI 경쟁 구도와 중국의 ‘반도체 자립’ 전략 양측 모두에 전략적 파장을 일으키며, 업계·정책 당국·투자자 간 치열한 논의로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 입장에서 엔비디아의 중국 복귀가 ‘글로벌 AI 패권’을 굳건히 다지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평가한다. 반면 중국은 이를 통해 자체 GPU를 개발할 ‘골든타임’을 확보해, 장기적으로 미국 기술 의존도를 낮추려는 노력을 이어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미·중 ‘상호의존적’이면서도 복잡한 관계
엔비디아가 설계한 GPU는 현재 세계 AI 인프라의 중추다. 때문에 양국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면서도 경쟁적인 이중구조를 띤다.
“관계는 공생적이지만, 현시점에서 중국이 미국 기술을 더 필요로 한다”
고 분석한 다니엘 뉴먼 퓨처럼(Futurum) 최고경영자의 발언은 이같은 ‘미묘한 균형’의 핵심을 짚는다.
올해 초 미국 정부는 H20 칩의 중국 수출을 제한했다. H20은 기존 수출 규제에 맞춰 사양을 조정한 ‘다운그레이드’ 버전이었으나, 워싱턴은 중국군·중국 AI 산업 고도화에 활용될 수 있다며 제동을 걸었다. 이로 인해 엔비디아는 45억 달러 규모의 재고 손실을 인식했으며, 향후 수십억 달러 매출이 증발할 가능성을 경고했다.
엔비디아 창업자 겸 CEO 젠슨 황(Jensen Huang)은 이러한 규제가 “중국 시장을 놓칠 경우 회복하기 힘든 손실”이라며 비판해 왔다. 그는 제한 조치가 되레 중국 반도체 산업을 자극해 미국의 기술 우위를 훼손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고, 해당 메시지가 백악관에 일정 부분 반영됐다는 평가다.
워싱턴, ‘전략적 유연성’ 선택
엔비디아는 지난주 미 상무부 승인을 받아 H20 판매를 재개한다고 밝혔다. 상무부 고위 관계자인 하워드 러트닉(Howard Lutnick)은 CNBC 인터뷰에서
“중국이 계속 미국 기술 스택을 사용하도록 두는 것이 중요하다”
고 강조했다. 이는 단순한 매출 회복 이상으로 자국 기술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전략적 의도임을 시사한다.
매출 측면에서 중국은 엔비디아의 최대 단일 시장이다. 황 CEO는 CNBC 인터뷰에서 중국이 전 세계 AI 개발자의 50%를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완전 봉쇄가 현실화될 경우, 미국 기업들은 연구·개발(R&D) 재투자를 위한 현금흐름이 급감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인도 싱크탱크 탁샤실라(Takshashila) 연구원의 프라나이 코타스탄(Pranay Kotasthane) 부국장은 “최첨단 칩에 대한 접근은 제한하더라도, 범위를 무차별적으로 확장하면 전략적 실익이 없다”고 말했다.
중국, ‘국산 AI 칩’ 속도 조절될까
중국 내 최대 AI 칩 설계사인 화웨이(Huawei)는 일부 자국 기업에 칩을 공급하고 있지만, 엔비디아 최신 GPU 성능을 아직 대체하지 못한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미국 수출 제한이 중국 반도체 개발을 오히려 가속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러나 H20 재허용이 중국 스타트업의 자금 확보와 기술 진전 속도를 둔화시킬 위험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글로벌 X ETF의 테자스 데사이(Tejas Dessai) 리서치 디렉터는 이메일 인터뷰에서 “엔비디아 칩이 다시 공급되면 국산 칩 프로젝트 동력과 투자금이 위축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는 미국의 ‘AI 기술 영향력’을 글로벌 공급망에 계속 투영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AI 개발자들은 여전히 엔비디아 하드웨어를 선호한다. DGA-앨브라이트 스톤브리지 그룹의 파트너 폴 트리올로(Paul Triolo)는 “화웨이 개발환경은 사용성이 떨어지고 유연성이 제한적이어서, 엔비디아 CUDA 생태계를 대체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전문용어 한눈에 보기
GPU는 그래픽 연산 장치로, 복잡한 병렬 연산을 처리해 AI 학습·추론에 필수적이다. CUDA는 엔비디아가 제공하는 소프트웨어 플랫폼·개발도구 모음으로, 개발자가 GPU를 활용한 AI 모델을 손쉽게 구축하도록 지원한다. 트레이닝은 AI 모델이 대규모 데이터를 학습하는 과정이며, 인퍼런싱(추론)은 학습된 모델을 실제 서비스(챗봇·검색엔진 등)에 적용해 결과를 산출하는 과정을 뜻한다.
중국의 ‘추론용 칩’ 기회
전문가들은 중국이 장기적으로 ‘추론용 칩’ 시장에서 기회를 모색할 것으로 본다. 대규모 학습에 최적화된 GPU 대신, 가격 경쟁력과 에너지 효율을 갖춘 맞춤형 프로세서가 필요해지면, 중국 빅테크 및 스타트업들의 맞춤형 칩 프로그램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는 전망이다.
데사이 디렉터는 “인퍼런스 수요가 급증하는 시점이 오면, 중국 기업의 커스텀 칩이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기자 관전평
이번 조치는 미국·중국 모두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절묘한 타협으로 평가된다. 미국은 엔비디아 생태계를 통해 글로벌 AI 표준을 선점할 수 있고, 중국은 당장 부족한 고성능 GPU 공급을 해소하며 내재화를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공존은 어디까지나 ‘부분적 완화’에 불과하며, 최첨단(최고 사양) 칩 통제는 그대로 유지돼 있다. 양국 정책 방향이 언제든 다시 경직될 가능성을 고려할 때, 한국과 같은 제3국 반도체·장비 업체에게도 리스크 관리와 시장 다각화 전략이 더욱 중요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