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발 원유 충격,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기억 불러일으켜…역사가 반복될 가능성은 낮다

이란발(發) 원유 공급 차질이 1970년대 아랍 금수조치 이후 최악 수준으로 이어지면서 아시아 전역에 확산되는 경제적 고통이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의 공포를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다. 통화 약세 압력, 자본 유출 리스크, 치솟는 에너지 비용으로 인한 긴급 대책 가동,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 소진 등이 1997년의 기억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태국은 휘발유 배급을 단행했고 필리핀은 급등한 주유소 가격을 이유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역내 무역수지 적자 확대와 인플레이션 기대 상승 등은 당시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2026년 4월 9일, CNBC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이번 사태는 여러 면에서 1997년의 위기와 닮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경제학자들은 지적한다.

“위기는 여러 형태를 띠며 이번(이란발) 위기의 형태는 전혀 다르다.”

라고 채텀하우스의 수석연구원 데이비드 루빈은 말했다. 1997년 위기는 고정환율·단기 외채 집중·빈약한 외환보유액·높은 경상수지 적자의 ‘독성 혼합’이 원인이었지만, 그 이후 아시아 국가들은 통화체계 유연화와 외환보유고 확충 등으로 방어력을 크게 키워왔다는 설명이다.

금융 충격 대 물리적(공급) 충격이라는 관점에서 차이가 크다. 싱크탱크 외교문제평론위원회(CFR)의 선임 연구원 브래드 세처는 1997년은 금융계정 충격(은행 유입 중단)이었던 반면 이번은 경상계정 충격, 즉 원유 및 석유제품 공급의 물리적 차단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CNBC에 이메일로 보낸 설명에서 1997/98 위기가 영향을 크게 받은 나라들에는 금융 충격이 더 큰 타격이었다고 밝혔다.

이번 위기의 핵심은 호르무즈 해협(스트레이트 오브 호르무즈)의 사실상 봉쇄로, 역내 경제가 필요로 하는 원유 약 3천만 배럴 중 약 1천만 배럴(일일 기준)이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디젤과 항공유 가격도 급등해 아시아 전역에 공급 부족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외환보유액과 국내 금융시장 심층화가 방어막

미 연준(Federal Reserve)에 따르면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1월 말 기준 $4000억(약)을 웃돌아 1997~1998년 당시의 $300~400억 수준에서 크게 늘어났다. 한국의 원화 채권시장 규모는 약 3,500조원(약 $2.3조)으로 성장했고 외국인 보유 비중은 약 21%에 이른다. 인도의 외환보유액은 전쟁 이후 루피 방어를 위해 직접 개입한 결과 약 $6,880억 수준이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등도 30년 전보다 훨씬 큰 외환보유고를 보유하고 있다.

과거에는 달러표시 단기부채가 많아 통화 약세가 금융면의 손실을 증폭시켰지만, 현재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는 달러보유고를 축적했으며 통화 약세는 무역 측면에서는 오히려 이익을 줄 수 있다. 유라시아그룹의 중국 담당 다니엘 왕은 환율 개혁이 지역의 회복 탄력성을 강화했다고 설명했다. 1997년 영향을 심하게 받은 국가들은 준고정환율제를 유지해 중앙은행이 통화를 방어하기 위해 보유고를 소진했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아시아 통화는 더 자유롭게 움직여 완만한 약세로 압력을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태그플레이션(저성장·고물가) 위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자들은 이번 중동 갈등이 장기화되면 아시아가 스태그플레이션의 충격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나틱시스은행 아시아태평양 수석 이코노미스트 알리시아 가르시아-에레로는 이번 위기는 자초된 사태가 아니지만 1997년보다 재정적 여지가 훨씬 제한적이라고 지적했다. 공공부채 증가와 공격적 재정확대의 여력 부족이 과거와 다르다는 것이다. 특히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은 루피아·페소의 통화 압력, 자본 유출 가능성, 보조금 감축에 따른 재정적 부담이 크다고 평가됐다.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의 2026년 에너지 보조금 예산381.3조 루피아로 원유가 배럴당 $70을 가정해 편성되었으며 최악의 시나리오로 배럴당 $92를 가정하고 있다. 브렌트유 6월물 선물은 미-이란 간 2주간의 휴전 합의 이후에도 목요일 기준 약 $97/배럴 수준에 머물렀다. 필리핀의 경우 연초 이후 유가 급등으로 물가상승세가 가팔라져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4.1%로 20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고 2월의 2.4%에서 급등했다.


국가별 영향 차별화와 글로벌 파급 경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중국 등은 경상수지 흑자, 전략비축 유류 및 에너지 공급원 다변화 덕분에 이번 공급충격에 상대적으로 덜 취약하다. 가르시아-에레로는 싱가포르를 다각화된 성장 모델과 강한 제도 역량으로 인해 가장 견조한 경제 중 하나로 꼽았고, 말레이시아는 에너지 수출국이라는 지위와 반도체·AI 관련 투자 유입 지속으로 혜택을 보고 있다고 평가했다.

브루킹스연구소의 로빈 브룩스 선임연구원은 이번 충격이 아시아를 넘어 확산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만약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에서 유조선을 공격한다면 유가는 폭등하고 신흥국 통화는 대폭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는 신흥국 통화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중앙은행들이 달러를 확보하려고 미 국채를 매도할 가능성이 있고, 이로 인해 미 국채 수익률이 상승하며 글로벌 채권시장에 파급효과를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장 반응과 자본 흐름의 특성

아시아 지역의 투자자 포지셔닝은 공황 상태라기보다 신중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나틱시스의 가르시아-에레로는 인도네시아 채권에서의 선별적 자금 이탈이 지역 주식으로의 소폭 순유입으로 상쇄되는 등 광범위한 자본 유출은 아직 관찰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베딘 인베스트먼트의 고정수익 투자매니저 페사 위바와는 달리 현재 자본 흐름은 과거보다 더 변동성이 있으나 전반적으로 덜 붕괴적이며, 현 시점의 환율 움직임은 시장 조정의 일부로 해석된다고 진단했다.


용어 설명

경상계정(Current Account)은 한 나라의 상품·서비스 수지와 소득·이전 수지까지 포함하는 국제수지 항목으로, 상품 수입(예: 원유)이 급격히 줄거나 비용이 오르면 적자가 확대될 수 있다. 외환보유액(Foreign Exchange Reserves)은 중앙은행이 보유한 외화 자산으로, 환율 방어·수입 대금 결제 등에 쓰이므로 위기 시 중요한 완충장치 역할을 한다.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은 경제성장 둔화와 높은 물가가 동시에 발생하는 현상을 뜻한다. 호르무즈 해협(스트레이트 오브 호르무즈)은 세계 원유 수송의 핵심 해로로, 이 지역의 봉쇄는 국제 유가와 역내 연료 공급에 즉각적 영향을 미친다.


정책적 시사점 및 전망(전문가 분석)

전문가들의 종합 평가에 따르면 이번 충격의 향방은 유가 상승의 지속 기간지정학적 긴장 완화의 시점에 달려 있다. 단기간의 유가 급등은 대부분의 중앙은행이 통화긴축 또는 보합적 금리정책과 함께 재정정책으로 보조금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게 만들 것이다. 다만 과거와 달리 오늘날의 국가들은 더 큰 외환보유액, 깊어진 국내채권시장, 통화정책의 자율성 확대를 통해 급격한 통화방어형 금리 인상 없이도 환율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다.

만약 유가가 상당 기간 $90~$100 이상에 머무르면 아시아 각국은 소비자물가 상승과 성장 둔화의 이중고에 직면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에 따라 단기적으로는 연료 보조금 확대·선별적 재정지원·통화스와프 확대 등의 조치가 동원될 것이며, 중장기적으로는 에너지 다변화·전략비축 확대·에너지 효율화가 정책 우선순위로 재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전파 경로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지정학적 긴장 완화와 해상 안전 확보가 필수적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 신흥시장 통화·채권시장에 광범위한 긴장 확대가 발생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1997년과의 유사성은 통화 약세와 인플레이션, 자본 이동의 표면적 현상에서 관찰되지만, 금융구조의 변화와 외환보유고 확대로 인해 역사적 재연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다. 다만 시간이 흐르며 공급 충격이 누적될 경우 성장과 물가에 미치는 손상이 커질 수 있어 정책 당국의 대응능력과 국제사회의 충돌 완화 노력이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