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이 미·쿠바 관계의 오랜 갈등과 관련된 법적 쟁점을 심리한다. 1996년 제정된 헬름스-버튼법(Helms-Burton Act)의 적용 범위를 둘러싼 다툼으로, 쿠바 공산 정권이 혁명(1959년) 이후 몰수한 재산에 대해 미국 국민이 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한 제도적 근거가 주요 쟁점이다.
2026년 2월 22일, 로이터 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이번 대법원 심리는 연방법 중 특히 Title III 조항의 효력과 범위를 판단하는 사건 두 건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사건 당사자는 엑손모빌(ExxonMobil)과 크루즈 업계의 카니발(Carnival), 로열 캐리비안(Royal Caribbean), 노르웨지언 크루즈 라인(Norwegian Cruise Line), MSC Cruises 등이다.
사건의 핵심과 법적 쟁점
헬름스-버튼법의 Title III는 혁명 이후 쿠바 정부가 몰수한 재산을 ‘취급(traffic)’하는 개인이나 기업을 상대로 미국 법원에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다만 이 조항은 과거 여러 차례 대통령의 권한으로 중단(일시 정지)되어 왔는데, 이는 외교적·안보적 이유에서 행정부가 발동하였다.
문제는 대법원이 이번 사건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청구인들이 실질적으로 배상을 받을 수 있는 통로가 확장될지 또는 계속 제한될지 결정된다는 점이다. 두 사건은 각각 다른 법적 쟁점을 제기하지만 공통적으로 의회가 Title III를 통해 의도한 구제의 실효성을 가늠하게 만드는 사례다.
사건의 배경
쿠바 혁명 이후 1959년 이후 쿠바 새 정부는 공장, 설탕공장, 정유소, 발전소 등 다수의 미국 소유 자산을 국유화했다. 이러한 재산 가치는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평가된다.
헬름스-버튼법은 본래 1960년대 존 F. 케네디 대통령 시절의 행정적 봉쇄를 제도화한 측면이 있다. Title III는 몰수당한 재산의 원소유자 또는 그 후계자들이 증액된 손해배상(enhanced damages)을 청구할 수 있도록 연방법원에서의 구제를 허용한다. 청구 대상은 쿠바의 국유기업뿐 아니라 해당 재산을 알고도 이용한 다국적 기업까지 포함될 수 있다.
역대 대통령들의 중단 조치와 트럼프 행정부의 변화
역대 대통령들인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는 모두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Title III의 효력을 정기적으로 중단해 왔다. 이는 캐나다, 스페인 등 쿠바에 투자한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고려한 조치였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강경한 대쿠바 정책을 펼치며 이러한 중단을 2019년 해제했고, 이에 따라 2019~2020년에 약 40건의 소송이 제기되었다.
대법원 심리의 구체적 사건들
첫 번째 사건에서 엑손모빌은 1960년에 몰수된 석유·가스 자산을 놓고 쿠바 국영기업 CIMEX를 상대로 10억 달러가 넘는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엑손은 2019년 워싱턴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엑손이 상정한 핵심 법적 쟁점은 하급심(2024년)의 결정에 대한 항변으로, 하급심은 헬름스-버튼법상 소송 대상이 된 쿠바 국영기업들이 외국 주권면제(foreign sovereign immunity)를 주장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엑손 측 변호인단은 2024년 판결이 “카스트로 정부의 불법 몰수로 인한 피해자들이 회복할 수 있는 긴 장벽들 가운데 또 하나를 추가한다”고 주장
CIMEX는 법정에서 반대 입장을 표하며 2024년 판결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입장에 따르면 해당 결정은 “이 민감한 분야에 대한 의회 판단을 존중하고 보호한다”고 밝혔다.
법률 전문가들은 2024년 판결과 헬름스-버튼법에 대한 다른 판례들이 미국 기업들이 쿠바 관련 보상 청구를 진행하는 데 있어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든다고 평가했다. 워싱턴의 상업 소송 전문 변호사 자레드 부처(Jared Butcher)는 “많은 청구인들이 요구하는 시간과 자원이 과중하다”고 말했다.
크루즈 선사 관련 소송
두 번째 사건은 주권면제 문제가 직접적으로 걸려 있지 않다. 피고는 쿠바 국영기업이 아니라 민간 크루즈 회사들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핵심은 청구인이 몰수되지 않았더라면 현재 시점에 해당 자산에 대해 현행 재산권(present-day property interest)을 보유했을 것임을 입증해야 하는지 여부다.
하바나 도크스 코퍼레이션(Havana Docks Corporation)은 혁명 이전 하바나 항구에 부두를 건설한 미국 기업으로, 피델 카스트로가 집권한 직후 해당 회사의 법적 권리는 박탈되었다. 이후 2016~2019년 오바마 행정부가 쿠바에 대한 여행 규제를 완화할 때 이 네 개의 크루즈 운영사는 해당 터미널을 사용했다.
크루즈 회사들은 공동 서면 답변에서 행정부의 정책에 따라 쿠바 여행이 재개된 것을 따라간 것뿐이며 “행정부의 지침을 따른 결과로 수억 달러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상식에 반한다”고 주장했다. 연방법원 판사는 크루즈 회사들이 몰수된 재산을 ‘취급’했다고 판결해 총 4억 4천만 달러($440 million)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항소법원은 지난해 이러한 판결을 뒤집어, 헬름스-버튼법 청구인의 구제가 얼마나 어렵게 작동하는지를 부각시켰다.
벤더빌트 로스쿨의 잉그리드 브렁크 교수는 “청구인들이 헬름스-버튼법에 따라 회복하기가 여러 가지 이유로 어렵다”며 “1996년 의회가 법을 제정할 때 예상했던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모든 청구인이 승소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용어 해설
• 헬름스-버튼법(Helms-Burton Act): 1996년 미국 의회가 제정한 법으로, 쿠바에 대한 경제제재를 제도화하고 쿠바 정부가 몰수한 미국 국민의 재산에 대해 청구권을 인정한 법적 근거를 포함한다.
• Title III: 헬름스-버튼법의 한 조항으로, 몰수된 재산을 이용한 제3자에 대해 미국 법원에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하지만 대통령 권한으로 일시 정지할 수 있다.
• 외국 주권면제(foreign sovereign immunity): 일반적으로 외국 정부와 그 행위자들이 미국 법원에서 소송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법리. 다만 특정 예외가 존재한다.
시장과 외교에 미칠 영향 분석
법원의 판결은 단순한 법리 해석을 넘어 에너지, 해운·여행, 다국적 기업의 대외투자 등 실물경제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다. 엑손모빌 사건이 상응하는 법적 문턱을 낮춰주면, 쿠바와 거래하거나 쿠바 내 자산을 이용하는 다국적 기업들이 추가적인 소송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 이는 기업의 법적 비용 상승과 더불어 대(對)쿠바 투자 심리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
크루즈 업계의 사례는 관광·여객 산업의 규제 변화가 기업의 민형사상 책임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만약 대법원이 청구인이 현행 재산권 보유 가능성을 엄격히 입증해야 한다고 판단하면, 많은 청구의 실효성이 줄어들어 관련 기업들의 법적 불확실성이 일부 완화될 수 있다. 반면 더 넓게 해석될 경우, 항만 운영업체, 선사, 보험회사 등 관련 산업의 잠재적 손실이 확대될 우려가 있다.
또한 외교적 측면에서, Title III의 적극적 적용은 캐나다·스페인 등 쿠바에 투자한 동맹국들과의 마찰을 재점화할 수 있다. 과거 대통령들이 Title III를 중단했던 근본적 이유가 바로 동맹국들과의 외교적·경제적 관계 조정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법원의 해석은 미국의 대외정책 일관성과 동맹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전망
대법원의 판결은 헬름스-버튼법 적용의 문턱을 재설정하는 분수령이 될 가능성이 크다. 판결이 청구인에게 유리하게 나올 경우, 과거 2019~2020년 제기된 약 40건의 소송이 본격적으로 재가동되며 추가적인 배상 청구가 촉발될 수 있다. 반대로 정부·외국기업의 방어권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오면, 현재 진행 중인 청구들의 실효성은 더욱 제한될 것이다.
법적 불확실성이 해소되더라도 실제 배상 집행에는 국경 문제, 집행 가능성, 외교적 보복 등 복합적 제약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기업들은 판결 결과에 따라 리스크 관리와 대외투자 전략을 재점검해야 하며, 보험·법무 예산의 조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