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링(Kering)이 40억 유로(약 5조 8,000억 원)에 달하는 자사 뷰티 부문을 로레알(L’Oréal)에 매각하기로 합의하면서 주가가 약 5% 급등했다. 이번 결정은 새 최고경영자(CEO) 루카 데 메오(Luca de Meo) 취임 불과 몇 달 만에 단행된 주요 전략 전환으로, 케링은 다시 한 번 패션 본업에 집중하고 재무 건전성 회복에 방점을 찍었다.
2025년 10월 20일, 인베스팅닷컴 보도에 따르면, 이번 거래에는 케링이 2023년 인수한 하이엔드 니치 향수 브랜드 ‘크리드(Creed)’가 포함된다. 또한 로레알은 기존 계약이 만료되는 2028년 이후 구찌(Gucci)·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발렌시아가(Balenciaga) 등 케링 산하 주요 패션 하우스의 향수 및 뷰티 제품을 50년간 독점 생산·개발할 수 있는 라이선스를 확보한다.
이번 매각은 전 CEO 프랑수아 앙리 피노(François-Henri Pinault)가 2023년 출범시킨 ‘케링 뷰티(Kering Beauté)’를 사실상 해체하는 조치다. 당시 피노 전 CEO는 패션 외 카테고리 다각화를 시도하며 뷰티 부문 직영화를 통해 브랜드 가치 사슬을 확장하겠다는 포부를 밝혔으나, 불과 1년 반 만에 전략이 뒤집힌 셈이다.
부채 부담과 구찌 성장 둔화가 매각의 단초
케링은 6월 말 기준 순부채 95억 유로와 리스(임차)부채 60억 유로 등 총 150억 유로에 가까운 재무 부담을 안고 있다. 특히 그룹 영업이익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는 구찌가 중국 시장 부진으로 성장세가 급격히 꺾이면서, 레버리지(차입 의존도)에 대한 투자자 우려가 커져 왔다.
UBS 애널리스트들은 “약 40억 유로로 전해진 거래 가치는 케링의 재무구조를 개선하는 ‘작지만 확실한 호재’”라고 평하며, “데레버리징(부채 축소)이 올해 투자자들의 최대 관심사”라고 분석했다.
실제 크리드 통합과 보테가 베네타 향수처럼 자체 개발한 초기 라인업은 시장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으며, 뷰티 부문은 올해 상반기에도 여전히 적자 상태였다. 이에 대해 JP모건은 “루카 데 메오 CEO의 첫 실질적 행보로, 그룹 차원의 복잡성을 덜어내고 현금 창출 능력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의지”라고 평가했다.
로레알에겐 사상 최대 인수…럭셔리 향수 포트폴리오 강화
이번 딜은 로레알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수다. 로레알은 2023년 이솝(Aesop)을 25억 달러에 인수한 바 있으나, 크리드·구찌 향수 라이선스 확보는 그보다 훨씬 큰 가치 상승 요인으로 평가된다. 로레알은 럭셔리 향수·프리미엄 코스메틱 분야의 높은 성장률을 적극 흡수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양 사는 또 다른 전략적 연결 고리로 ‘웰니스·롱제비티(장수·건강) 공동 벤처’ 설립에도 합의했다. 이는 단순 라이선스를 넘어 장기적 파트너십을 모색하려는 모멘텀으로 해석된다.
투자자 시각: ‘쓴 약이지만 필요한 처방’
시장에서는 이번 매각을 두고 ‘쓴 약(bitter but necessary medicine)’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케링은 크리드를 인수할 때와 유사한 금액에 매각하게 돼 회계상 손상차손(impairment)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재무구조 개선이 우선순위로 부각된 만큼, 투자자들은 실적 회복과 현금 흐름 정상화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버니스타인(Bernstein) 애널리스트는 “구찌 턴어라운드에 CEO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도록 해 줄 결단”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이제 투자자들은 옵션보다 실행력을 확인하길 원한다”고 강조했다.
JP모건 역시 “장기적으로 뷰티 부문의 이익 잠재력을 포기하는 셈이지만, 단기간 그룹 레버리지 완화와 조직 단순화로 시장의 긍정적 반응을 이끌 수 있다”고 진단했다.
전문가 해설: 라이선스·데레버리징 용어 풀이
여기서 ‘라이선스(license)’란 특정 브랜드 소유자가 제3자 기업에 상표·디자인 등을 일정 기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하고, 그 대가로 로열티(사용료)를 받는 구조를 말한다. 패션 브랜드들이 화장품·향수 등 전문 역량이 필요한 분야를 외부 대기업에 맡길 때 주로 활용된다.
‘데레버리징(deleveraging)’은 기업이 부채를 줄여 재무 건전성을 높이는 전략을 의미한다. 차입 비중이 높은 기업은 금리 변동이나 경기 둔화 시 타격이 크기에, 주요 전략적 의사결정에서 부채 관리가 핵심 변수로 작용한다.
향후 전망 및 과제
시장 전문가들은 이번 매각으로 케링의 순부채/EBITDA(상각전영업이익) 비율이 의미 있게 낮아질 것으로 내다본다. 하지만 구찌의 실적 반등과 보테가 베네타, 발렌시아가 등 다른 브랜드의 성장 모멘텀 확보 없이는 주가 상승의 지속성이 제한적일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로레알은 크리드와 구찌 향수를 통해 고성장 카테고리에서 시장지배력을 높일 수 있으나, 2028년까지 기존 라이선스 파트너인 코티(Coty)와의 경쟁 구도를 관리해야 한다. 또한, 웰니스·롱제비티 벤처가 구체적인 성과를 내기까지는 시간과 자본 투입이 불가피하다.
한편, 케링이 여전히 보유 중인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브리오니(Brioni) 등 수익성이 낮은 소규모 브랜드의 추가 매각 가능성도 제기된다. JP모건은 “비핵심 자산 정리가 이어질 경우 그룹 마진이 단계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종합하면, 케링은 패션 본연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구찌의 브랜드 리포지셔닝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며, 로레알은 럭셔리 향수 성장세를 실적 개선으로 연결하는 실행력이 요구된다. 이번 거래가 양대 프랑스 그룹의 투자 서사에 어떤 장기적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