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예산 적자 해소 위해 고소득자 대상 세금 인상 시사

모스크바발 로이터 통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 4년 차에 접어든 국가 재정 부담을 덜기 위해 고소득층을 중심으로 한 특정 세목 인상 가능성을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2025년 9월 18일, 로이터 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 정부는 오는 9월 29일 국회에 2026∼2028 회계연도 예산안을 제출할 예정이며, 예산 적자를 억제하고 외환·금융 비축을 유지하기 위해 부가가치세(VAT) 인상을 포함한 다각도의 세수 확대 방안을 검토 중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하원의 각 교섭단체 대표들과의 회동에서 “사치세(luxury tax) 및 주식 배당소득에 대한 추가 과세는 전시(戰時) 상황에서 충분히 합리적일 수 있다”며 신중론을 전제로 한 세제 손질 의사를 피력했다. 그는 다른 세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미국도 베트남전·한국전 당시 고소득층 세율을 올렸다“고 사례를 들며 전시 재정 동원 논리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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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과세 논의 및 재정 운용 기조

러시아는 2021년 누진소득세제를 도입했고, 2024년에는 고소득자 세율을 추가 인상했다. 그러나 재무부는 과거 “배당소득세율을 높일 경우 자본시장 투자심리가 위축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회의에서 푸틴 대통령이 직접 배당세 인상을 거론하면서 세제 개편 속도와 폭을 동시에 넓히려는 의도가 읽힌다.

역설적으로 푸틴 대통령은 지난 9월 5일 2030년까지 세제 안정성을 보장하겠다며 “세율보다 노동생산성 제고를 통해 세수를 확보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재정 전문가들은 “생산성 향상은 중·장기 과제인 만큼, 당장 전쟁비용을 충당하려면 고소득층 과세 강화로 회귀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예산준칙 재가동 및 유가 연동 메커니즘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같은 날 개최된 연례 금융포럼에서 ‘예산준칙(budget rule)’ 복원을 발표했다. 이 제도는 유가가 특정 컷오프 가격을 초과하면 초과 세수를 국가재정안정기금(NWF)에 적립하고, 반대로 유가가 기준 이하로 떨어지면 해당 기금을 인출해 예산 부족분을 메운다.

컷오프 가격은 2025년 배럴당 60달러이지만, 정부는 2026년부터 매년 1달러씩 낮춰 2030년에는 55달러로 조정할 예정이다. 실루아노프 장관은 “에너지 매출 의존도를 2025년 8월 누적 25%에서 22% 수준으로 낮춰 ‘근육질(𝘮𝘶𝘴𝘤𝘶𝘭𝘢𝘳)’ 예산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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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준칙이 없으면 국제유가 하락 시 국가 재정은 곧바로 취약해진다.” ―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

현재 국가재정안정기금 잔고는 약 4조 루블(미화 482억 달러)이며, 러시아 정부는 올해만 4470억 루블(53억 9,000만 달러)을 인출해 GDP 대비 1.7% 수준의 재정적자를 보전할 계획이다.


고유가·강(强)루블 효과와 세수 감소 압력

로이터 계산에 따르면 2025년 9월 러시아의 석유·가스 수출액은 전년 동월 대비 약 23% 감소가 예상된다. 이는 유가 하락루블화 강세가 동시 발생한 결과다. 푸틴 대통령은 최근 내각회의에서 “경제 성장률이 지난해 4.3%에서 1% 안팎으로 둔화되는 속도에 실망스럽다”고 공개 질책했다.

전문가들은 “전쟁 장기화, 에너지 가격 변동성, 서방의 제재 3중고가 지속되는 한 세수 기반 약화는 불가피하다”며, 단기적인 재정 운신 폭 확보를 위해서는 선별적 세율 인상 외에도 은행 배당 제한·특별배당금 징수 등 준(準)세금적 모델을 동원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한다.


전문가 시각 및 시장 파장

모스크바 소재 싱크탱크 ‘가이더 연구소’의 이리나 지가노바 선임연구원은 “높은 소득세는 소비 위축을 초래해 중장기 성장률을 더 끌어내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동시에 “외국인 직접투자(FDI)가 전쟁 이후 반토막 난 상황에서 과도한 배당 과세는 증시 유동성 고갈로 이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증권사 알파뱅크의 안드레이 몰차노프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정부의 세금 인상 의지가 명확해지면 10월 이후 루블화에 단기 강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면서도, “결국 원자재 수출이 줄어든다면 외화보유액이 빠르게 소진될 수 있다는 점은 변함없다”고 분석했다.


용어 해설: 예산준칙과 석유 컷오프 가격

예산준칙(budget rule)은 러시아가 2004년 알렉세이 쿠드린 당시 재무장관이 도입한 재정 안정 장치다. 유가가 일정 기준을 초과할 때 ‘초과 세수’를 비축기금으로 돌려 예산의 상시적 균형을 유지하는 제도이며, 2022년 전쟁 발발 이후 중단됐다가 다시 가동되는 셈이다.

컷오프 가격이란, 유가와 세수 적립·인출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선을 의미한다. 이를 지속적으로 낮추면 ‘보수적 유가 시나리오’에서도 국가 재정이 버틸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된다.


향후 전망

푸틴 대통령은 2030년까지 “핵심 세율 동결“을 공언했지만, 실제로는 고소득자 및 배당소득을 겨냥한 선별적 세율 인상이 연쇄적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예산준칙 강화, 기금 적립 기조 복원, 사치자산 과세 확대 등 다중 방어선이 동시에 구축되면서, 러시아 재정 구조는 ‘유가 의존도 축소’와 ‘내수 부담 전가’라는 변증법적 과제에 직면하게 됐다.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와 무디스가 이미 러시아 국채를 투기등급으로 강등한 가운데, 이번 세제 개편 움직임은 향후 신용등급 변동 트리거로도 작용할 전망이다. 특히 서방의 에너지 제재가 장기화될 경우, 재정 안정 기조가 외생 변수에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결국 문제는 유가가 아니라 전쟁이 언제 끝나느냐에 달려 있다.” ― 익명을 요구한 유럽계 투자은행 러시아 담당 임원

이처럼 러시아 정부는 전쟁 수행 비용과 국민경제 안정화라는 이중 과제를 떠안고 있다. 세금 인상·예산준칙 복원·재정안정기금 활용이라는 3중 패키지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동할지, 시장 참가자들은 예의주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