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주요 해운업체들이 국제연합(UN) 산하 국제해사기구(IMO)가 다음 달 채택을 추진 중인 넷제로 프레임워크(Net-Zero Framework·NZF) 개정안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그리스 최대 선사를 포함한 15개 해운·유조선 기업은 IMO에 ‘근본적 보완’이 없다면 합의 채택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2025년 9월 18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이번 공동 성명에는 키프로스에 본사를 둔 프론트라인(Frontline)과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해운사 바흐리(Bahri)를 포함해 액체·가스 운반선 부문 세계 1~2위를 다투는 거대 기업이 대거 서명했다. 서명사는 총 15곳으로, 그리스계 안젤리쿠시스(Angelicoussis) 그룹, 다이나콤(Dynacom), 가슬로그(Gaslog), 한국 한화오션(구 한화해운) 등 각국 대표 선사가 포진한다.
이들은 공동 성명에서 “
현 NZF는 해운 탈탄소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하지 못하며, 동일 선상에서 경쟁해야 하는 업계에 역차별을 초래할 위험이 높다
”고 주장했다. 특히 “입안 당국은 현실적인 감축 궤적(realistic trajectories)을 고려해 탄소 수수료(Carbon Levy) 구조를 재설계해야 한다”며 ▲지나치게 급격한 비용 인상 ▲소비자 물가 상승압력 ▲선복량 축소에 따른 공급망 왜곡 등을 우려했다.
■ 왜 NZF가 논란인가
넷제로 프레임워크는 IMO 환경위원회(MEPC)가 2024년 4월 잠정 합의한 초국가적 규제안이다. 핵심은 국제항해에 투입되는 모든 선박이 탄소 배출 기준을 초과하면 이산화탄소 당 일정 수수료를 납부하도록 하는 것이다. IMO가 징수한 기금은 녹색연료 개발, 저탄소 기술 실증 사업 등에 재투자된다. 그러나 규모가 큰 선단을 운영하는 대형 선사일수록 초기 부담이 폭증해, 중동·그리스·한국의 원유·가스 운반선 업체들이 집단 반발하고 있다.
업계는 특히 연료 생산·공급 인프라가 아직 탄소제로 연료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점을 문제 삼는다. LNG·암모니아·메탄올 등 저탄소 대체연료 가격이 기존 벙커유보다 2~4배 비싼 상황에서, 추가 탄소 수수료까지 부과되면 운임(프레이트 레이트)과 소비자 가격이 급등할 수 있다는 논리다.
■ 미국, “NZF 수용 시 관세·비자 제한” 압박
시장 관측통들이 눈여겨보는 대목은 미국 정부의 공개 반대다. 로이터는 9월 중순 복수 외교 소식통을 인용해, “바이든 행정부가 동맹국에 NZF 채택 반대를 요구하며, 찬성 시엔 항만 할증료·비자 제한·관세를 경고했다”고 전했다. 전통적으로 기후 규제 강화를 지지해 온 미국이 수입물가·물류비 상승을 이유로 제동을 건 셈이다.
이에 대해 IMO 아르세니오 도밍게스 사무총장은 17일(현지시간) 런던에서 열린 캐피털링크 해운 콘퍼런스 기조연설에서 “조직의 지난 협상 경험을 볼 때 10월 정기총회에서 NZF는 결국 통과될 것”이라며 낙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그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와 회원국 우려가 남아 있지만 타협 정신만 유지된다면 불가능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 그리스 정부도 ‘조건부 찬성’ 기류
바실리스 키킬리아스 그리스 해운부 장관은 ‘런던 국제해운주간’ 행사 중 도밍게스 총장을 만나 “개선이 필수적”이라며 선사 입장에 힘을 실었다. 해운부 성명에 따르면 키킬리아스 장관은 “그리스 선사들은 전 세계 해운 톤수의 21%를 보유하고 있어 규제 충격이 가장 크다”고 지적했다.
로이터는 IMO 내부 문건을 인용해 “회원국이 반대표를 던지거나 대거 기권할 경우 10월 총회에서 최종 채택이 물 건너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전했다. 실제로 스몰 아일랜드 스테이트, 아프리카 산유국, 중동 국부펀드 등이 이해가 첨예하게 갈린다.
■ 해상 운송, 전 세계 교역의 90% 담당
현재 전 세계 교역량의 90%가 바다를 통해 이동한다. IMO와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국제해운은 전 지구 탄소배출의 약 3%를 차지하지만, 별도 감축 메커니즘이 없다면 2050년엔 전체 산업 배출의 10% 비중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선박 1척의 엔진 출력은 항공기보다 최대 5배나 높고, 고유황 중질유(HSFO)를 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단, 업계는 ‘규제가 아닌 기술적 해법’을 선호한다. 디젤·벤젠·SOx 배출을 최소화하는 스크러버(scrubber) 장착, 풍력 보조 추진장치(Flettner 로터), 선체 도장 효율 개선 등으로 20~30% 배출을 즉시 감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NZF는 탄소집약도(CII)와 연동되는 수수료 체계를 도입하기 때문에, 장·단기 비용 분석에서 의견이 갈린다.
■ 전문 용어 해설*
* IMO(International Maritime Organization)는 1948년 설립된 UN 전문기구로, 선박 안전·환경 규제를 담당한다. 회원국은 175개국이다.
* 넷제로 프레임워크(NZF)는 2050년 ‘선박 온실가스 순배출 0’ 목표 달성을 위한 로드맵으로, △탄소수수료 △친환경연료 보조금 △연료생산 인프라 투자 등을 결합한 최초의 글로벌 해운 규제안이다.
* 탄소 수수료(Carbon Levy)는 선사가 배출한 이산화탄소 톤( tCO₂ ) 기준으로 IMO가 부과하는 비용을 말한다. 초과 배출분 1t당 100달러 부과 시, 초대형 유조선(VLCC)은 왕복 항해 한 번에 최대 50만 달러가 추가 발생할 수 있다.
■ 전망과 시사점
시장조사업체 클락슨 리서치는 “NZF가 현행안대로 통과될 경우, 2030년까지 전 세계 선주 비용이 연 700억 달러(약 93조 원) 늘어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선복량 1만2,000TEU급 컨테이너선 신조선가의 10배에 해당한다.
반면 친환경 연료·엔진 시장은 수혜가 기대된다. 글로벌 3대 엔진 제조사 만 에너지솔루션(MAN ES), 베르탈라(Wärtsilä), GE 마린은 암모니아·수소 추진 엔진 상용화를 앞두고 있으며, 2028년 시장 규모가 400억 달러로 급성장할 전망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IMO가 해운 탄소 규제 대여정을 시작한 것은 불가피한 흐름”이라면서도 “단계적·차등적 도입 없이는 국제물류망 충격이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전가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중소 선사는 금융·기술 여력이 부족해 구조조정 압력이 더 클 수 있다.
결국 오는 10월 IMO 환경위원회 회기에서 ‘개정된 NZF’가 통과될지, 또는 채택이 연기될지가 글로벌 해운·에너지·무역 시장의 최대 변수로 부상했다. 로이터는 “반대·기권이 늘 경우 최종 승인 가능성이 불확실하다”고 재차 보도했다.
선사와 규제 당국 간 신경전이 고조되는 가운데, 해운 탄소중립을 둘러싼 ‘정책 속도·비용 분담’ 논쟁은 한층 뜨거워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