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SEC, 집단소송 회피 원하는 IPO 기업에 사실상 ‘면죄부’…강제중재 조항 허용

미 SEC, 집단소송 회피 원하는 IPO 기업에 사실상 ‘면죄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3 대 1의 표결로 기업공개(IPO)를 준비 중인 기업들이 주주 집단소송(class-action lawsuit)을 정관에서 금지하고 강제중재(mandatory arbitration) 조항을 삽입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이번 결정으로 월가 데뷔를 노리는 기업들이 법원 대신 중재 절차를 통해 투자자 분쟁을 해결하도록 요구할 길이 열렸다.

2025년 9월 17일, 인베스팅닷컴의 보도에 따르면, SEC는 당일 워싱턴 공개 회의에서 그동안 관행적으로 유지해 온 ‘집단소송 금지 기업의 상장 불허’ 방침을 뒤집었다. 표결은 공화당 위원 3명 찬성, 민주당 위원 1명 반대로 갈렸으며, 실제 정책 문서로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수십 년간 암묵적으로 적용되어 온 내부 지침을 공식 폐기한 셈이다.

이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유사한 논의가 있었으나 실질적 조치로 이어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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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 의장 폴 앳킨스(Paul Atkins)는 “위원회는 특정 기업의 분쟁 해결 방식이 선(善)인지 악(惡)인지 판단하는 자격 심사 기관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반면 민주당 출신으로 남은 유일한 위원인 캐롤라인 크렌쇼(Caroline Crenshaw)는 “이번 정책은 많은 소액주주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기업의 위법 행위를 그늘 속에 숨길 것”이라며 강력히 비판했다. 그녀는 집단소송이 정보 공개, 손해배상, 법리 발전 측면에서 핵심적 역할을 해 왔다고 역설했다.


집단소송·중재제도란 무엇인가?

집단소송은 다수의 피해자가 하나의 대표 소송으로 법원에 제기해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파급력 있는 판결을 이끌어내는 제도다. 반면 강제중재는 계약서에 ‘분쟁 발생 시 법원이 아닌 중재기관에서 해결한다’는 조항을 삽입해, 비공개·비판결 방식으로 분쟁을 매듭짓는다. 중재 판정은 법원 판례(Precedent)를 남기지 않으므로 공적 감시와 법리 축적이 제한된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기업 측은 “집단소송 남발로 과도한 소송비용과 이미지 손상”을 호소하며 중재를 선호한다. 반대로 소비자·투자자 보호 단체와 원고 측 변호사들은 “중재 절차가 비공개로 진행돼 기업의 잘못이 사회에 알려지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공화·민주 간 극명한 대립

공화당과 기업 로비 단체들은 수년간 “형식적·경미한 고소 남발을 막아야 한다”며 SEC 내부 지침 철폐를 요구해 왔다. SEC 다수 위원은 이번에 “기관의 역할은 공시·투명성 규제이지, 민사 분쟁 해결 방법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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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민주당은 “소액주주 다수에게 실질적 구제 수단이 되는 집단소송권을 박탈하는 결정”이라고 즉각 반발했다. 상원 은행위원회(Senate Banking Committee) 민주당 간사인 엘리자베스 워런(Elizabeth Warren) 상원의원은 같은 날 SEC에 서한을 보내 “주주권과 공익을 훼손할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2012년 칼라일 그룹(Carlyle Group) 사건의 연장선

집단소송 금지 조항 논쟁은 2012년 사모펀드 칼라일 그룹이 IPO를 추진하면서 미래 주주 분쟁을 전면 중재로 돌리겠다고 밝히자 SEC가 반대 의사를 내비친 데서 촉발됐다. 당시 칼라일은 결국 해당 조항을 철회하고 상장에 성공했지만, 이번 결정으로 유사 사례가 다시 등장할 가능성이 커졌다.


전문가·학계 반응

집단소송 변호사 출신으로 현재 콜로라도대 로스쿨(University of Colorado Law School)에 재직 중인 앤 립턴(Ann Lipton) 교수는 “공적 감시를 중단시키고 법리 발전을 멈추게 만드는 끔찍한 조치”라며 “기업 부정이 드러날 기회를 원천 차단한다”고 비판했다.

업계에서는 “거래 비용이 대폭 줄어들어 기업가치 상승에 긍정적”이라는 반응도 있다. 일부 법무법인(Law Firm)은 발 빠르게 ‘IPO 강제중재 패키지’ 자문 서비스를 준비 중이라는 전언이다.


추가 규제 일정도 연기 검토

SEC는 같은 날 바이든 행정부 때 도입된 사모펀드(Private Investment Fund) 추가 공시 규정의 준수 기한을 다시 미룰지도 논의했다. 해당 안건은 별도 표결로 진행될 예정이다.


심층 해설: 국내 투자자에게 주는 시사점

한국 기업도 뉴욕 증시에 상장할 때 SEC 규정 적용을 받는다. 이번 결정으로 국내 스타트업이 미국 시장에 진출할 경우, 강제중재 조항을 통해 잠재적 소송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투자자 관점에서는 정보 비대칭이 심화될 위험이 있는 만큼, 공시·재무 데이터를 다각도로 검증해야 한다.

또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트렌드에 비춰보면, 지배구조 투명성을 약화시키는 이번 정책이 국제 자본의 평가에 어떤 변수를 던질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론 및 전망

SEC의 이번 결정은 ‘분쟁 해결 방식의 민영화’라는 평가와 함께 공공성 약화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앞으로 IPO를 준비하는 기술·바이오 기업들이 집단소송 리스크 제로화를 앞세워 투자자에게 조건을 제시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주주권 보호 단체와 사모펀드 규제 강화를 추구하는 진보 진영은 법 개정, 정책 질의, 공청회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제동을 걸 전망이다.

결국 향후 수년간 미 연방의회·사법부·규제기관이 ‘사적 중재’와 ‘공적 소송’ 간 균형점을 어디에 둘지가 글로벌 자본 시장의 관전 포인트로 부상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