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을 ‘명목 기준점’으로 삼는 물가 억제 정책의 딜레마
신흥국들이 물가 상승률(인플레이션)을 빠르게 억제하기 위해 환율을 고정하거나 관리하는 방식을 채택해 온 것은 1980~1990년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적 정책 수단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단기적으로는 효과적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실질 환율 고평가와 경상수지 악화 등 부작용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2025년 8월 3일, 인베스팅닷컴의 보도에 따르면, 영국 경제조사기관 캐피털 이코노믹스(Capital Economics)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터키와 아르헨티나가 현재 채택 중인 환율 앵커 정책에 내재한 위험을 경고했다.
보고서는 1980~1990년대에 환율 앵커를 도입했던 10개 주요 신흥국을 분석한 결과, 도입 1~2년 차에 물가가 급격히 하락하는 ‘초기 효과’가 공통적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후 장기 디스인플레이션(가격 안정) 속도는 더뎌, 평균적으로 10년이 지나서야 한 자릿수로 진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실질 환율 고평가와 경쟁력 상실
캐피털 이코노믹스는 특히
“명목환율이 안정된 상태에서 소비자물가가 무역 상대국보다 빨리 오르면 실질 환율이 오버슈트(over-shoot)될 수밖에 없다”
고 지적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통화제도 전환 후 중앙값 기준 6년 만에 실질 환율이 50%가량 상승한 사례가 다수였다. 이는 수출 가격 경쟁력 둔화로 직결돼, 멕시코(1994), 러시아(1998), 그리고 아르헨티나·터키(2000년대 초)의 외환위기를 촉발한 핵심 원인으로 꼽힌다.
경쟁력 상실로 인한 경상수지 적자는 자본 유입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며, 외국인 투자자들이 심리적으로 불안요인을 감지할 경우 대규모 자금 이탈이 발생해 통화·금융 위기로 번질 위험이 커진다.
외화 차입 증가가 불러올 ‘대차대조표 리스크’
보고서는 추가 리스크로 외화 표시 대출 비중 확대을 들었다. 최근 터키의 은행 대출 중 외화 대출 비중이 30%에서 35%로, 아르헨티나는 10% 미만에서 19%로 각각 상승했다. 이는 환율이 급격히 절하될 경우 기업·가계의 원화 환산 부채 부담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 러시아(1998)와 아르헨티나(2001) 외환위기 당시, 은행권의 대차대조표 불일치(부채·자산 통화 불일치)가 연쇄 파산·신용경색을 악화시킨 전례가 있다. 다만, 보고서는 “현재 양국 은행 시스템의 건전성 지표는 과거 위기 때보다는 양호하다”면서도, 경상수지 적자 확대 흐름과 결합될 경우 위험 노출도가 급격히 증가할 수 있다고 경계했다.
국가별 상황: 터키 vs. 아르헨티나
보고서에 따르면, 두 국가 모두 실질 환율이 이미 상당 수준으로 높아졌지만, 터키는 과거 리라 급락으로 ‘저점’(undervaluation)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경쟁력 희생과 물가 억제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더 넓은 완충 여력을 보유한다.
반면 아르헨티나는 실질 환율이 ‘의미 있는 고평가’(significantly overvalued) 상태에서 물가 억제에 나서고 있어, 경상수지 적자 확대와 대규모 페소 평가절하 가능성이 동시에 커져 있다. 보고서는 “두 통화 모두 급격한 절하 위험을 안고 있으나, 아르헨티나 페소의 리스크가 더 크다”고 명시했다.
‘정책 지속성’이 관건…정치 리스크가 변수
캐피털 이코노믹스는 외환 앵커제를 유지하며 거시경제 안정을 회복하려면, 장기간에 걸친 정치적 의지가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멕시코·폴란드 등은 ‘거시 건전성(macro-orthodoxy)’를 견지해 물가를 장기적으로 한 자릿수에 안착시킨 반면, 터키·아르헨티나는 정치 변수로 인해 정책 일관성을 잃어 여러 차례 물가 목표 달성에 실패한 전례가 있다.
특히 터키는 2023년 이후 재정·통화 정책 간 불일치가 시정되고 있으나, 지방선거·대선 등 정치 일정마다 통화 완화 압력이 반복돼 왔다. 아르헨티나 역시 자국 통화에 대한 불신과 정치사회적 불안이 상존해, 안정화 프로그램의 지속 가능성이 도마에 올라 있다.
용어 설명: ‘실질 환율’과 ‘앵커 정책’
실질 환율(Real Exchange Rate)은 명목환율을 국내·해외 물가 수준으로 조정한 지표다. 명목환율이 변하지 않아도 국내 물가가 해외보다 빠르게 오르면 실질 환율은 상승(고평가)한다. 이는 수출품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환율 앵커 정책은 특정 통화나 환율 수준을 지표로 삼아 물가 기대를 ‘고정’하려는 전략이다. 단기 신뢰 회복에는 효과적이지만, 목표 환율 유지를 위해 외환보유액 소진·금리 급등·자본통제 등 부작용이 뒤따를 수 있다.
전문가 시각: ‘속도 조절’ 없는 억제책은 독이 될 수도
필자는 신흥국 거시경제를 장기간 취재하면서, 환율을 이용한 단기 인플레 억제가 “강력한 진통제이자 동시에 고위험 약물”임을 목도해 왔다. 초기 물가 하락이 과신(過信)을 부르고, 필요 이상으로 고평가된 통화는 불가피한 평가절하의 시한폭탄이 된다.
결국 점진적·신뢰 기반의 통화정책과 생산성 제고가 병행되지 않는 한, 환율 고정은 장기 성장잠재력마저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터키와 아르헨티나 사례가 다시금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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