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토(QUITO)—에콰도르 대통령 다니엘 노보아(Daniel Noboa)가 헌법재판소(Constitutional Court)의 보안 관련 법률 일부 효력 정지 결정에 반발해 대규모 시민 행진을 주도했다.
2025년 8월 12일,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노보아 대통령은 새로 통과된 치안 법률 세 건의 핵심 조항이 중단되면 조직범죄 대응이 차질을 빚을 것이라며, 사법부가 국민 의사를 거스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헌법재판소가 인권단체의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일시 중단시킨 조항은 ① 보안군의 직무상 과오에 대한 면책, ② 통신사로부터 특정 정보 제출을 의무화, ③ 신용협동조합 규제 변경 등이다. 해당 단체들은 “시민 기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대통령의 주장과 시위 양상
노보아 대통령은 시위 현장에서 확성기를 잡고 “우리는 정의와 평화를 구한다. 누구를 짓밟으려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집권 세력인 국민민주행동당(National Democratic Action)은 지난 6월 이 세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킨 바 있다.
행진 경로 곳곳에는 헌법재판관 9명의 얼굴과 이름을 실은 대형 전광판이 설치돼
“‘우리의 평화를 앗아가는 판사들’—이들이 우리를 지켜줄 법을 가로막고 있다”
는 자극적 문구가 담겼다. 대통령실 대변인은 “해당 광고판은 정부 예산으로 제작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노보아 대통령은 검은 방탄조끼에 티셔츠 차림으로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는 9명이 변화를 가로막도록 좌시하지 않겠다”고 강경 발언을 이어갔다.
사법부의 반응과 국제 우려
에콰도르 헌법은 재판 중인 사건에 대해 대법원·헌법재판소 구성원이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금지한다. 그럼에도 재판소는 성명을 내고 “신원 노출 광고는 판사들의 신변 위험을 증가시켜 법원의 독립성을 직접적으로 침해한다”고 비판했다. 같은 날 헌재 청사 주변 경비 인력과 경로가 갑작스레 조정돼 판사들의 안전 우려가 커졌으며, 시위대는 “부패 판사 물러나라!”를 연호했다.
공청회는 다음 주부터 열릴 예정이며, 이 자리에서 효력 정지된 조항들의 합헌성 여부가 본격적으로 다뤄질 전망이다.
한편, 마거릿 새더스웨이트(Margaret Satterthwaite) 유엔 특별보고관(사법 독립·변호사 및 법관 안전 담당)은 “타 권력이 법원을 압박할 수 있다는 점이 우려된다”며 “판사들은 어떤 위협도 없이 자유롭게 일해야 한다”고 밝혔다.
배경: 치안 악화와 노보아 정부의 대응
에콰도르는 최근 몇 년 새 마약 밀매 조직의 세력 확대와 살인·납치·갈취 급증으로 중남미 내에서도 치안 불안이 심화되고 있다. 노보아 정부는 이를 이유로 군(軍) 동원령을 확대하고, 마약 범죄 형량 상향 등 강경책을 추진해 왔다.
‘보안군 면책’ 조항은 군·경이 작전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 침해 혐의에 대한 사법적 책임을 면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제인권규약과 충돌할 수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통신자료 제출 의무화 조항 또한 사생활 침해 가능성이 논란이다.
기자 해설
노보아 대통령의 행진은 ‘국민안전 대 사법독립’이라는 첨예한 가치 충돌을 한눈에 보여 준다. 헌재와 유엔 특별보고관이 언급했듯, 사법부 판사들의 개인 신상정보 공개는 민주주의 원칙인 권력분립을 흔드는 선례가 될 수 있다.
반면, 치안 악화로 일상적 공포에 직면한 에콰도르 시민들은 노보아 정부의 강경책에 상당 부분 공감하는 분위기다. 정치적 지지율을 높이고 내년 대선까지 동력을 이어가려는 계산도 엿보인다. 그러나 보안군 면책은 단기적 치안 성과를 넘어 국가폭력 책임성 결여라는 구조적 위험을 내포하며, 사법 체계에 대한 국제 신뢰 저하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향후 공청회 결과가 표현·사생활·사법 독립 등 기본권과 안보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재정립할지, 그리고 노보아 행정부가 법원 결정을 존중할지 여부가 관건이다.